[성남의 예술가] 소프트 조각가 김채윤: 미술이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할 때
- artviewzine
- 6월 2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월 4일
기억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기억을 저장하고 꺼낼 때 우리는 저마다의 매개체를 사용한다. 김채윤 작가는 부드러운 천을 꿰매고 깁는 행위로 기억을 기록하고 감정을 구체화한다. 그 대상은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성남이라는 지역,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사라져 가는 모든 것,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글 김문영 객원기자 | 사진 최재우

바느질로 형상화하는 부드럽고 친근한 세계
‘돌멩이는 차갑고 나무는 딱딱하다’는 것은 고정된 감각이자 관념이다. 상흔은 추하고, 옛것은 매력적이지 않으며, 쓸모를 다해 버려지는 것들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인식도 진실이 아니다. 김채윤 작가의 소프트 조각은 차갑고 딱딱한 대상조차 따뜻하고 친근한 감각으로 다시 느끼게 한다. 고정된 감각과 생각을 비틀고 단단한 세계에 균열을 내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담긴 작업이다.
김채윤 작가는 천이나 실 같은 부드러운 소재로 형상을 만드는 소프트 조각을 중심으로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융합을 시도한다. 주제는 지역과 자연, 인간의 관계에 대한 탐구다. 특히, 변화하는 도심 속에서 잃어버린 기억과 이야기를 발굴해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 오늘도 발 딛고 살아가는 성남이라는 지역이 가진 역사와 삶이 작가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는다.
연성 소재 중에서도 천과 실을 먼저 선택해 꿰매고 깁는 행위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출발은 작가가 유년 시절에 만든 인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키우던 강아지를 잃은 아이는 솜뭉치와 천으로 강아지와 닮은 인형을 직접 만들어 지니기 시작했다. 인형을 잃어버리면 강아지의 기억도 사라질 것처럼 소중하게 간직했다. 몇 년이 지나 인형을 잃어버렸을 때,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인형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어릴 때부터 믿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저에게 인형은 단순한 장난감이나 장식물이 아니라 영혼의 상징이에요. 인형은 기억과 감정, 존재를 연결하는 끈이자 매개체라는 인식이 점점 선명해지면서 소프트 조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부드럽고 가벼운 천이 실 하나로 이어져 입체가 되고, 생명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매력적이에요. 본래 인형은 사람 형상의 장난감을 일컫는 말이지만 제 작업에서는 어떠한 형태에 국한되지 않아요. 돌멩이도, 타일 조각도 상상의 산물로 인형이 될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이 소프트 조각이 기억과 감정을 지닌다는 점이니까요.”

애처롭고 아름다운 상흔을 새기다
대학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하고 작가로 데뷔한 2018년의 작업은 힘든 기억과 감정을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김채윤 작가는 강아지 인형을 만들던 마음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상처를 들여다봤다. 사람들이 자주 입는 의복에 그들의 상흔을 바느질로 새겼다. 흉터들은 애처로웠지만, 동시에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었기에 감추지 않고 드러낼수록 아름다워 보였다.
성남이라는 지역을 탐구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부터 시작했다. 작가는 신흥2동과 산성동 재개발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으면서 버려진 것들을 수집했다. 머잖아 허물어질 집에 남겨진 타일 조각이나 문패처럼, 어쩐지 마음이 쓰이던 물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부드러운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수진동과 신흥1동에서는 동네 고유의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집 앞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시한 주차 구역, 청테이프로 막아 둔 하수구, 다양한 모양의 창문 가림막, 옥상정원, 다닥다닥 붙은 건물의 옥상을 넘나드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엮여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자연발생적인 그 풍경들은 성남 원도심의 정체성을 대변했지만, 도시개발 과정에서 소외되고 사라져 갔다. 작가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희생된 것들이 가진 가치들을 주목했다.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과 정서
지역의 삶에 관한 기억과 감정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은 김채윤 작가의 관점과 작업 방식, 소재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9년에는 성남문화재단이 중앙지하상가에 개소한 청년예술창작소에서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자와 또래 작가들을 만났다. 팀을 이뤄 각자가 10대 시절을 보낸 지하상가의 추억을 교환하고, 장소의 의미를 찾는 작업을 진행했다. 원도심과 신도심의 경계를 떠도는 유령이 되어 재개발 현장을 배경으로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고, 다양성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중앙지하상가 패션을 재현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김채윤 작가는 개인 작업과 공공예술의 연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2024년에는 위례 스토리박스 ‘메이커스 아틀리에(Maker’s Atelier)’ 입주작가로 <나의 푹신한 수호신(My Fluffy Tutelary)>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6회에 걸쳐 시민과 함께한 프로그램으로, 더 이상 입고 쓰지 않는 옷이나 가방 등 버려질 원단을 활용해 자신의 수호신을 제작하는 작업이었다.
‘수호신’이라는 테마의 모티프가 된 것은 창곡동 세촌마을의 명물로 위례 스토리박스에 자리한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였다. 작가는 나무의 역사와 전설을 발굴해 23명의 참가자들과 공유하고, 각자 갖고 싶은 수호신을 상상해 자유로운 형태의 소프트 조각으로 형상화하도록 이끌었다. 6세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들은 개개인의 믿음과 소망이 담긴 수호신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자유로운 소통과 창작을 경험하는 한편, 완성작을 도감으로 정리해 전시로 선보이는 성취감도 공유했다.

오래된 문방구의 미래적 복원
올해 김채윤 작가는 ‘2025 성남예술인 예술창작활동’ 공모 선정작가로 또 다른 이야기를 발굴하고 있다. 성남 원도심의 오래된 문방구를 찾아다니며 사라져 가는 기억을 복원하는 <Afterglow Chamber> 프로젝트다. 문방구에서의 경험과 감각을 기술과 예술로 재구성해 ‘미래 도시에 존재할 잡화점’이라는 상상의 공간을 전시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작가는 몇 년 전부터 원도심 곳곳을 다니며 문방구라는 공간의 변화를 관찰했다. 답사가 마무리되어 가는 최근에는 변화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방문했을 때 이미 폐업한 모습에 돌아선 적도 여러 번. 문방구들은 모바일 지도 서비스의 업데이트 속도보다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마을 문방구들을 답사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준비물을 나눠 주니 문구점을 방문할 이유가 점점 줄어드는 데다 트렌디한 무인 문구점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죠. ‘여기 남은 물건은 이제 다 쓰레기다’라던 어느 문방구 사장님의 씁쓸한 목소리도 기억에 남습니다. 문방구들이 사라져 가는 현실 속에서 과거 그 공간이 지녔던 의미와 경험을 어떻게 프로젝트 안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찾아간 문방구들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고스란히 현재로 소환해 애틋하면서도 그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시절 아이는 함부로 쓸 수 없는 작고 소중한 용돈을 손에 쥐고 두근거리며 문방구에 입장했다. 온갖 흥미로운 물건이 넘치는 그곳에서 아이는 마치 4차원 세계로 빨려 들어온 듯, 나만의 보물을 찾는 모험의 시간을 보냈다. 천장 가까이 진열된 물건을 뒤지기도 하고, 낮은 진열대 아래에 쌓인 물건을 살펴보려 옷에 먼지가 묻는 줄도 모르고 바닥에 엎드렸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 느꼈던 행복감과 성취감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김채윤 작가는 <Afterglow Chamber> 프로젝트를 통해 일상에서 잊고 지냈던 감각을 일깨우고, 주변의 작은 가치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하고 싶다고 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무언가를 탐색하고 발견하는 경험은 지금 이 시대에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무엇을 원하든 스마트폰 화면을 몇 번 누르는 것만으로 간단히 얻을 수 있는 시대니까요.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고 눈으로 자세히 살피는 아날로그적인 탐색 과정은 색다른 감각을 일깨워 줍니다. 문방구라는 공간에서 먼지가 쌓인 곳까지 기꺼이 들여다보는 물리적인 행위는 인내심과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숨겨진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낯선 감각을 일깨우는 이질적 요소들
과거의 문방구가 현재에 갖는 의미, 미래에 존재할 방식을 제시하기 위해 <Afterglow Chamber> 프로젝트는 ‘애니매트로닉스’라는 새로운 장르와의 융합을 모색한다. 애니매트로닉스는 애니메이션과 일렉트로닉스를 합친 단어로, 로봇 기계를 이용해 모형을 움직이는 기술을 뜻한다. 김채윤 작가는 소프트 조각에 기계를 결합해 움직이거나 소리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주된 의도는 소프트 조각에 생명력과 서사를 불어넣는 것이다.
<Afterglow Chamber>의 목표 중 하나는 소프트 조각이 가진 따뜻하고 친근한 속성과 동떨어진 재료, 기법, 기술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애니매트로닉스 외에도 3D프린팅, 3D모델링을 시도하기 위해 최지혜 작가와 협업한다. 성남에서 함께 자란 친구이기도 한 최지혜 작가는 영화 특수효과 분야에서 일하다가 기술의 예술적 표현 가능성에 주목했고, 퇴사 후 실리콘을 주재료로 하는 조형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Afterglow Chamber>는 김채윤 작가의 소프트 조각 작업과 애니매트로닉스, 최지혜 작가의 실리콘 조각 및 3D프린팅 작업이 결합하는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성남문화재단의 2025 성남예술인 예술창작활동 공모선정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인 만큼, 작가는 공공의 지원이 새로운 예술 활동의 중요한 토대라는 소감을 밝혔다.
“재단의 지원은 지역예술인들이 창작 활동을 이어 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지난 3년간 회사 생활과 작업을 병행하다 보니 새로운 도전이 버거웠는데, 창작지원금 선정으로 그동안 꿈꾸던 작업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프트 조각의 특성 때문에 작업실이 없으면 힘든 점이 많은데, 위례 스토리박스에 입주해 쾌적한 환경에서 작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의 힘
김채윤 작가는 위례 스토리박스 입주작가로서 시민을 만나는 프로그램에도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해 ‘푹신한 수호신’에 이어 올해는 <Afterglow Chamber> 프로젝트 일부를 시민과 함께할 계획이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신선한 영감을 얻게 됩니다. 예술이 특정 개인의 영역이 아닌 모두의 문화 활동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고무되고 있어요. 시민들의 참여가 작품이 되고 전시에서는 더 많은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프로젝트로 만들고 싶습니다.”
오래된 문방구를 복원하는 작업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어 갈 작업도 그 본질은 작가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에 있다. 작가는 지역의 설화, 사라져 가는 동네, 사람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기억과 감정을 찾아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소프트 조각과 새로운 기술, 다른 작가나 시민과의 협업 등 길은 무궁무진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이야기의 원천이 거기 존재하는 한 김채윤 작가의 여정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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