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의 예술가] 시각예술가 이지연: 일상의 틈을 비집고 떠나는 심심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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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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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12시간 전
성남아트센터와 이매촌을 잇는 태원지하보도가 10년 만에 새로운 풍경으로 시민을 맞이한다. 세월의 더께가 쌓여 있던 콘크리트 벽 위로 부드러운 색감의 선과 면이 포개져 미로 같은 길을 펼쳐 낸다. 일상의 공간에 겹겹이 새겨진 ‘접힌 문’들은 과연 어디로 이어질까? 직선 끝의 목적지 대신, 상상의 공간으로 길을 잃고 싶어지는 이곳에서 <심心·심審·한 산책>을 기획한 이지연 작가를 만났다.
글 박채림 객원기자 | 사진 최재우

성남아트센터와 이매촌을 잇는 태원지하보도.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이곳을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오가는 통로를 넘어,
마음을 살피는 쉼의 공간으로 재정비했다
지난여름부터 가을까지 태원지하보도에 <심心·심審·한 산책> 설치작업을 이어 오셨어요. 그간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마치 시간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아요. 여름까지만 해도 태안의 창작 스튜디오에서 작업 스케치를 하며 장맛비가 그치길 기다렸는데, 막상 설치 작업이 시작되고 나니 가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더라고요. 매일 날씨를 비롯한 여러 변수에 대응하고 그에 맞는 방향성을 고민하다보니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었네요. 개인전 준비를 병행하느라 더 바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태원지하보도가 가진 공간적 특성이 작가님께 영감을 주었다고 들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지하보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둡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지하보도를 지날 때마다 위치와 눈높이, 주변 풍경이 계속 달라진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길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익숙한 공간에 통로를 내는 제 기존 작업과도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업 후반에는 ‘통로’로만 보이던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이 아침이면 주거 단지를 떠났다가 저녁이면 성남아트센터에서 이매촌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시더라고요. 오가는 공간이 아니라 어쩌면 ‘돌아오는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 작업을 통해 지하보도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확장된 셈입니다.
일상의 무료함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
이번 작품은 외벽에 UV 인쇄 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요,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없었나요?
날씨를 비롯해 정말 많은 변수가 있었어요. 기존 벽체 상태 점검 당시에는 폐기물을 최소화하고 싶었는데, 결국 작품 완성도를 위해 재보수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페인트 대신 UV 벽면 인쇄를 선택했지만, 인쇄 업체도 이 정도 규모의 작업은 처음이라 기술적으로 미흡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와 건조가 지연되면서 결국 작업 기간이 4배로 늘어났어요. 특히 날씨나 환경적인 요인으로 미흡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다가올 봄에 다시 한번 점검할 계획이에요. 마음이 지치는 순간도 있었지만, 재단의 배려가 힘이 되었어요. 무엇보다 오가는 시민분들이 격려와 기대의 말씀을 많이 건네주셔서 끝까지 작업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2019년부터 <심심한 산책> <심심한 상상> <심심한 방>까지 여러 시리즈를 이어 오셨어요.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의미의 ‘心審’이라는 표현을 쓰시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삶에 있어 ‘심심한 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무료하거나 심심한 상태가 마치 시간 낭비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죠.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무척 재미있게 지냈던 것 같아요. 열심히 뛰어놀기도 했지만, 마음껏 공상할 수 있는 여백이 있었달까요? 도파민이 넘치는 요즘에는 이런 심심한 순간이 무척이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할 일 없는 무료함, 멈춰 있는 심심함 속에서야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마음 심(心)에 살필 심(審)을 더해 ‘심심함’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지요. 나를 살피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요.

벽화 속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접힌 문’은 지하보도를 오가는 시민들에게 문 너머의 공간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마음을 살피는 요소로써 작가님께서는 일상적 공간에 단순한 면과 선을 더해 상상의 공간을 내고 계세요. 작업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제 기억 속의 공간을 좇아 작업을 시작했어요. 어린 시절, 저는 벽 너머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거든요. 상상 속에서는 끊임없이 길이 생겨나고 그 너머의 어딘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어요. 무한히 확장하는 놀이터 같았죠. 문과 계단을 그릴 때마다 저는 다른 사람들도 그 문을 통해 어디론가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길 바라요. 같은 맥락에서 제 작품이 상상 속 공간으로 연결해 주는 일종의 통로라고도 생각합니다. 특히 태원지하보도와 같이 공간에 맞춰 작품의 크기가 커지면,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관객이 작품을 통로 삼아 자유롭게 드나드는 장면을 보는 일은 작가 로서 경험하는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작가님의 작업은 평면 작업인 동시에 관객이 작품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일련의 작업이 주는 즐거움은 어디서 오나요?
저는 평면적인 방법으로 공간을 입체화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언뜻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는 회화를 통해 그려 낸 선과 면이 겹치면서 생겨나는 일종의 양감(量感)이 있다고 생각해요. 면과 선이 겹이 되고 그 안에 생겨나는 여백과 틈이 있고, 관객은 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죠. 그러다 보면 작업이 자연스럽게 점점 확장해 가요. 특히 어린이 관객들이 제가 그린 선과 면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다닐 때 일종의 해방감과 같은 재미를 느낍니다.
태원지하보도와 같은 공공미술 작품은 시간이 지 나며 색이 바래거나 흔적이 남는 과정이 필연적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물리적 변화는 회화 작품에서도 고민하는 부분이지만, 외부 설치 작품에서는 더 크고 빠르게 다가와요. 지금까지 제가 작업해 온 외부 작품들은 대부분 설치 수명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태원지하보도 작품에서는 ‘시간의 흔적’이 큰 숙제로 다가왔습니다. UV 인쇄로 시작했지만, 벽의 상태와 인쇄 품질을 고려해 페인트 채색을 더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민한 결과였어요. 시작 단계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작업했고,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계획입니다.
지역 그리고 사람과 공명하며 확장하는 예술
이번 태원지하보도 작업에서 작가님께서 가장 크게 고려하신 것은 무엇이었나요?
무엇보다 ‘분위기’를 바꾸는 데 신경 썼습니다. 실제로 설치하는 동안 오가시던 시민분들이 이 공간이 그동안 어둡고 무서웠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공모 역시 환경 재정비에 목적성이 있었기 때문에, 제 작업의 특징이자 장점인 밝은 색감과 단순한 이미지로 기존과는 다른 분위기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특히 지하보도가 가진 어두운 인식을 ‘밝고 경쾌한’ 감정으로 옮겨 오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작업 과정의 안전에 신경 썼습니다. 이건 어린이 전시를 경험하며 생긴 습관이 기도 해요. 특히 외부 설치 시에는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작품이 훼손되는 한이 있어도 관객이 되는 시민에게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 공간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작업을 통해 시민들이 어떤 예술 경험을 하길 바라시나요?
무엇이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발견하고 궁금해하는 순간을 만나길 바랍니다. 겹겹이 새겨진 문을 지나 각자 궁금해하던 곳으로 가닿았으면 좋겠어요. 비록 그림 앞에 서서 상상하던 공간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바뀌었음을 인지하고 느끼는 순간의 경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술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요?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지는 작업이요. 누군가에게는 달걀처럼 보일수 있고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제 작업이 저마다의 상상으로 이어지는 작고 소소한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 작가님께서 가장 골몰하시는 화두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올해 개인 전시를 통해 ‘틈’과 ‘겹’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각각 <시간의 틈_선을 타고 가는 시간>과 <공간의 겹_선이 지나가는 공간>입니다. 두 작업 모두 공간 안에서의 ‘시간’에 대해 다루고 있고요. 또 이번 <심심한 산책>에서 보여 준 ‘접힌 문’의 모티프는 2023년부터 이어 온 작업인데요, 지난해부터는 그동안의 조형성을 해체해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작업에서 반복되던 방식과 요소에서 탈피해 저 자신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벽화는 디지털 이미지를 벽면에 인쇄하는 UV 프린팅 작업 후, 벽의 상태와 인쇄 품질이 고르지 못한 부분은 작가가 직접 페인트로 덧칠해 마무리했다
공공미술은 시대와 도시의 맥락에 따라 달라져 왔습니다. 작가님은 현재의 공공미술을 어떻게 바라 보시나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사례가 있다면요?
다양한 공공미술이 시민의 요구에 부응하며 매력적인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고 생각해요. 물리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민과의 교감과 교류를 통해 ‘시간’을 나누는 방식의 공공미술도 등장했고요. 물론 비용이나 환경 문제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안고 가야 할 숙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파크에 설치된 애니시 카푸어(Anish Kapoor)의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인상적이었어요. 둥근 형태의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로 된 설치물인데 재료의 특성 때문에 주변 풍경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기죠. 다들 자연스럽게 자신을 비춰 보려고 작품에 다가 가게 되는데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작품에 접근하고 궁금해하는 점이 좋았어요. 앞으로도 도 시 안에 그저 장식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참여와 이야기를 통해 장소의 맥락을 잇는 공공미술 작품이 다양하게 등장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올해 성남문화재단의 <모든예술31 성남>에 참여한 소감을 들려주세요.
문화재단의 지원사업은 지역예술인이 새로운 작업을 실험하거나 발표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기회입니다. 이전에 2018~19년 청년 프로젝트 지원을 통해 ‘놀이터 프로젝트’를 실행한 경험도 있는데요, 예술인으로서 그때의 경험이 큰 자양분이 되었어요. 기존과는 다른 기법을 실험해 보거나 다양한 예술가와 협업할 수 있었고요. 또 후속 작업에서 현재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해 주었지요. 이처럼 지원사업은 예술가의 성장을 지역이 응원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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