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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1]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


© JINSOO LEE


구도자의 여정.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생애만큼 이 말이 어울리는 연주가는 드물다. 언젠가 파리에서 그의 베토벤 소나타를 들은 한 청중이 기자에게 말했다. “아주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 음악은 여행이고 음악가는 여행가란 말이 실감이 난다.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음악 칼럼니스트

 

맑은 눈망울 같은 순수로 돌아오다

백건우는 전작주의자다. 한 작곡가를 붙잡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끈기와 정성으로 음악 세계는 깊어져 갔다. 작곡가와 작품의 근본에까지 파고들어 가려는 노력 때문에 청중은 작품이 아무리 무겁고 어렵더라도 음악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백건우의 자세는 늘 한결같다. 음악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추며 음악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연주에 성실을 기한다.

누구나 음악 안에서 나름대로의 진리를 찾는다. 그러나 백건우의 성실하고 제의적인 태도는 ‘음악의 구도자’란 표현보다 차라리 ‘음악의 사제’를 연상시킬 때가 많다.

일찍이 독특한 향기 어린 라벨이나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데카로 이적한 후에 녹음한 바흐-부소니, 포레, 쇼팽 협주곡, 베토벤 소나타, 도이치그라모폰 레이블을 달고 발매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간주곡, 슈베르트 작품집, 쇼팽 녹턴, 슈만 작품집, 그라나도스 <고예스카스> 등은 공통점을 가진다. 하나같이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며 웅숭깊은 연주라는 점이다.

백건우는 말한다. “여행은 완벽하게 준비하고 가더라도 계획대로 안 되죠. 하긴 계획대로만 돼도 재미없겠죠. 인생도 그런 것 같아요.”

그 중심에 한 작곡가가 있을 뿐이다. 한번 사로 잡히면 모든 것을 집중하고 투입하는 그의 정신에서 다른 연주자의 연주에선 볼 수 없었던 오라(aura)가 풍기게 된다.


성실하고 겸손하게 음악을 마주하다

백건우 인생 최대 프로젝트는 데카에서 발매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녹음이었다. 당시 백건우는 베토벤이란 작곡가를 고전주의자가 아닌 낭만주의자로 봤다. 고전주의 음악은 궁정에서 추던 춤곡이었다. 궁정을 떠나지 못했던 하이든과 모차르트와는 달리, 음악을 들고 거리로 나가 대중에게 전하기 시작한 혁명가 베토벤을 표현하려 했다.

2011년 브람스의 간주곡, 카프리스, 로망스를 연주한 독주 음반을 발매해 작곡가 특유의 잿빛 회한에 슬픔과 평온함을 묵직하게 투사했다. ‘음표마다 고독해야 한다’는 브람스의 말대로 그의 타건은 담담하고 향기로웠다.

베토벤과 브람스 이후 ‘순례자’ 백건우가 향한 곳은 슈베르트였다. 2013년 DG 레이블을 달고 발매된 새 음반은 <4개의 즉흥곡, D899>와 <악흥의 순간, D780 Op. 94> 2번·4번·6번, <피아노 소곡, D946> 중 1~3번을 수록했다. 백건우는 가장 슈베르트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숙고를 거듭했고, 그에 따라 순서를 재배열했다. 아첨하지 않는 연주, 달지 않은 해석이었다.

2019년 백건우는 쇼팽의 <녹턴>을 발표했다. 쇼팽을 가장 가깝게 그려 보고 싶은 마음이 녹턴으로 쏠렸다. “작은 살롱에서 친구들과 연주하며 진실한 대화를 나누던 쇼팽의 모습을 재현하고 싶었다”는 그는 그동안 노출됐던 쇼팽의 겉모습보다는 내밀한 속내를 이야기했다.

백건우는 단순히 ‘예쁜 곡’이나 ‘부담 없이 듣기 좋은 곡’이라는 녹턴의 통념을 깨뜨린다. 그는 쇼팽의 녹턴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연주하기로 마음에 담아 두었던 숙제라고 했다. 음반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쯤 비로소 쇼팽이 남긴 숙제와 대화가 시작됐다.

이후 백건우의 시선이 머문 작곡가는 로베르트 슈만이다. 2020년 9월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발표한 백건우의 ‘슈만’ 앨범 각 장엔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이란 이름을 붙였다. 슈만의 분열된 음악적 두 캐릭터로 각각 내성적이고 순수한 자아와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자아를 뜻한다. 베토벤과 슈베르트, 브람스의 작품들로 채워졌던 백건우의 아카이브에서 슈만은 의외의 빈 챕터였다. 백건우가 사사했던 거장 빌헬름 켐프가 위의 세 작곡가들을 잘 연주한 명수였고, 그와 더불어 슈만 해석에 일가를 이루었던 점을 생각해 볼때 이례적이었다. 이에 대해 백건우는 “젊은 시절 슈만이란 작곡가가 불편했다”고 말했다. “그땐 이유를 몰랐는데 그만큼 슈만의 세계가 복잡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녹음을 하며 슈만의 삶과 음악이 더욱 깊게 다가왔다”고 그는 말했다. 클래식 팬들은 다기 속에서 서서히 진하게 우러나는 차의 향처럼 백건우의 세계에 젖어 들었다.

2022년 백건우의 시선이 처음으로 스페인 작곡가 그라나도스를 향했다. 스페인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고예스카스> 각각의 곡들은 독립적이다. 고야의 특정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다만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전편을 관통한다. 이 곡을 작곡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형제처럼 친했던 이사크 알베니스(1860~1909)의 죽음이었다.

“슬픔과 우아함이 서로 뒤섞여 시적인 분위기 속에서 표현되도록 노력했다. 사랑스럽고 열정적인 음이 격정적이고 비극적인 음으로 변하는데, 이는 고야의 그림들에서도 느껴진다”는 그라나도스의 설명대로였다. 2023년, 그는 병마로 고생하던 사랑하는 그의 분신 윤정희를 떠나보냈다.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

일시 | 5월 24일(금) 오후 7시 30분

장소 | 성남아트리움 대극장

문의 | 031-783-8000


인생의 산을 넘고 그려 낼 모차르트

이제 2024년, 여전히 맑은 그의 눈망울은 모차르트의 순수를 향한다. 너무나 유명한 작곡가 모차르트지만 지금껏 미뤄 왔던 녹음이다. 천상의, 천연의 상태를 그대로 퍼 온 것 같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인위적으로 그려 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감동을 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감각을 갖게 되기까지, 그는 모차르트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연기해 왔다.

“모차르트는 아이가 치기에는 너무 쉽고 어른이 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 남긴 말대로다.

백건우는 5월 24일 성남아트리움 대극장에서 새 음반의 수록곡인 모차르트만으로 리사이틀을 펼친다. <환상곡, K397> <론도, K485> <피아노 소나타 2번, K280> <안단테, K616> <아다지오, K540> <지그, K574> <환상곡, K396> <전주곡과 푸가, K394> 등 백건우의 자연스러운 흐름대로 배열한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다. 7세 때부터 건반 앞에 앉았던 백건우. 이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노거장의 경륜과 통찰, 혜안으로 그리는 모차르트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관객인 우리 자신도 모르는 채 간직해 온 순수를 발견할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JIN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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