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연휴 기간에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공항에서 오래 기다렸다고들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여행사와 항공사가 곤경에 처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공항 출국장이 북새통이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여행사들은 다시금 여행상품을 홍보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동유럽 여행패키지 안내가 눈에 들어온다. ‘동유럽’이라니. 우리가 동아시아, 중남미 등 대륙의 일부를 일컫는 표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냉전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동유럽이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들을 서유럽과 구분하는 표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때 는 영영 갈 수 없는 곳이었다.

트라반트 601 ©shutterstock
소련이 해체되었고 철의 장막(鐵-帳幕, Iron Curtain)에 있던 나라들은 차례차례 독립해서 국가 이름을 바꾸기도 했으니 서유럽과 다른 체제를 가진 지역이라는 의미의 동유럽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흔적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예컨대, 과거의 동유럽 지역뿐 아니라 유럽의 도시 한구석에서는 낯선 자동차를 간간이 만나게 된다. ‘클래식 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고 낡은, 그야말로 구식 자동차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브랜드도 아닌 자동차라면 소련 해체 이전의 동유럽에서 제작된 자동차가 틀림없다. 적어도 20세기 말까지 자동차 디자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화려한 전문 분야였고 매년 새로운 자동차가 등장해서 신분의 상징처럼 소비되곤 했다. 그러면 철의 장막 안은 어땠을까? 그곳 사람들도 자동차를 타고 다녔을 텐데 그 세계에 자동차 디자인이 있었을까?
(좌) 영화 <Go Trabi Go>의 포스터와 국내에서 출시된 비디오 버전의 커버 / (우) 2 베를린 시내의 트라반트 601 ©김상규
트라비에게 갈채를
동독에 살던 슈트러츠 우도는 독일이 통일되고 여행이 자유화되자, 죽기 전 나폴리를 보라고 외친 괴테의 말에 따라 아내 리타와 딸을 데리고 나폴리로 여행을 떠난다. 동독의 자동차 트라비를 타고 떠난 그들이 처음 머문 곳은 서독에 사는 리타의 언니 부부 집이었다. 서독 주민들로부터 동독에서 온 거지 취급을 당하는 등 괄시를 받으면서도 일행은 트라비를 몰고 이탈리아로 향한다. 트라비는 잦은 고장으로 속을 썩이기도 하지만 슈트러츠 가족에게 봉사하면서 드디어 로마에 도착한다.
<트라비에게 갈채를 Go Trabi Go>(1991)이라는 제목의 영화 내용이다. 트라비라고 불리는 이 작은 자동차가 그 유명한 ‘트라반트’다. 1963년부터 1990년까지 판매되었던 이 차는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할 때 활용되기도 했다. 한동안 베를린에 머물 때 거리에서 트라반트가 눈에 띄면 예사롭지 않게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격동의 역사를 지나온 자동차, 어쩌면 누군가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준 자동차가 아닐까 상상하곤 했다. 어느 날 벼룩시장의 잡동사니들 틈바구니에서 <Trabant 601> 카탈로그를 발견하고 얼른 구입했다. 사진을 토대로 그린 이미지들에다가 자동차 내부를 설명하는 테크니컬 드로잉까지 인쇄되어 있었다.

닛산의 피카로 쿠페 ©닛산자동차 홈페이지
동독의 자동차
동독의 자동차 트라반트라고 하면 ‘트라반트 601’ 모델을 가리키지만, 그 이전에 여러 모델이 있었다. 츠비카우 지역의 자동차 회사 VEB 작센링(VEB Sachsenring Zwickau)의 엔지니어들이 1951년에 개발한 P70 모델부터 P50을 거쳐 1962년에 ‘트라반트 600’으로 알려진 P60이 나오면서 트라반트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트라반트라는 이름은 P50을 제작하던 직원들이 우리도 번호가 아니라 이름을 지어야 하지 않겠냐는 요구를 하자 여러 가지 제안된 이름 중에서 선택된 것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P70 모델이 훗날 일본의 닛산(Nissan) 자동차에서 내놓은 ‘피가로’ 모델의 원형이 되었다는 점이다. 둥글둥글하면서 친근감 있는 형태인데 그 이유는 독특한 소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동독에서는 철판을 가벼운 소재로 대체하려고 했고 그 결과가 듀로플라스트(Duroplast)라는 합성수지였다. 그 소재를 처음 적용한 모델이 바로 P70였다.
독일역사박물관, DDR 뮤지엄에는 트라반트가 한 대씩 전시되어 있고 시내에서 관광객을 실은 트라반트를 종종 볼 수 있다. 베를린의 기념품점에서도 트라반트 미니어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으니 동독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같은 시기에 동독의 국영 자동차 기업에서는 바르트부르크라는 모델도 생산하고 있었고 특히 311 모델은 우아한 스타일로 해외에 잘 알려졌다. 그런데 어떻게 트라반트가 동독의 대표적인 자동차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무척 저렴했고 튼튼해서 수명이 대단히 길었다는 점이다. 그에 비하면 바르트부르크는 고급 승용차라서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아무래도 대중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트라반트는 부품이 복잡하지 않아서 수리도 쉬웠고 모델 변경이 잦지 않아서 그만큼 대규모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에 동독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자동차가 되었다. 실제로 트라반트 601은 1963년에 개발된 뒤에 거의 변함이 없었던 덕분에 1990년까지 지속적으로 생산될 수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80년대 초부터 폭스바겐이 동독과 경제협력 차원에서 엔진 일부를 동독 자동차 기업에서 생산해서 납품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통독 준비가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동독의 바르트부르크 311 ©위키피디아
폭스바겐 이전의 스코다
1954년 런던에서 열린 모터쇼에 체코슬로바키아가 개발한 자동차가 등장했다. ‘스코다 1200’이라는 모델이다. 고전적인 자동차로 손색이 없는 디자인이었고 모터쇼에서 좋은 반응을 얻자 곧장 영국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스코다는 동독의 자동차들 못지않게 유명세가 있었다. 1200 모델 이후로 큰 변화가 없었으나 1970년에 시작된 S110R은 꽤 유명해졌다. 이 모델을 대체하여 ‘래피드(Rapid)’가 주력 수출 모델이 되었다. 스코다는 심기일전해서 새 모델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베르토네가 스타일링에 도움을 주었고 포르쉐에서 기술적인 지원을 받기까지 했다. 그렇게 1989년에 ‘페 이버릿’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동유럽이 사회주의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자동차 디자인이 날개를 달 때가 된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 시점 이전과 이후로 스코다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바로 이듬해 스코다 자동차의 모기업은 민영화되어 곧장 폭스바겐과 합병했다. 그리고 스코다의 대표 모델이던 래피드는 폭스바겐의 관심 밖이었던 탓에 단종되고 말았다. 이후부터 스코다의 멋진 로고가 붙은 자동차라고 해도 그저 폭스바겐의 디자인에 지나지 않는다. 1992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시점이 역사적으로 는 진일보하는 계기였으나 체코의 자동차 디자인 측면에서 보면 체코의 고유한 디자인 특성이 사라지는 역설적인 순간이다.
(좌) 체코슬로바키아의 스코다 1200 광고 / (우) 1984년에 생산된 스코다의 래피드 ©스코다 홈페이지
비운의 발라톤
발라톤은 호수가 있는 헝가리 관광지로 알려져 있으나 독특한 자동차의 이름이기도 하다. 동구권의 경제협력기구였던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의해 헝가리는 승용차를 만들 수 없었다. 따라서 오토바이 엔진을 사용한 초소형차(microcar)로 물꼬를 트는 시도가 있었고 그중 하나가 발라톤(Balaton)이었다. 전투기 제조창에서 제작된 탓인지 이 차의 문은 전투기의 조종실처럼 슬라이딩 방식으로 열린다. 그러니까 문과 창, 지붕이 통째로 뒤로 밀려야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발라톤은 간혹 우스꽝스러운 자동차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수작업으로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장난감처럼 보일 만하다. 하지만 1956년 노동절에, 지금도 잘 알려진 이세타(Isetta) 자동차와 함께 당당하게 차량 행진을 하는 사진을 보면 헝가리 사람들에게는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헝가리 정부에서도 발라톤과 알바 레지아(Alba Regia)를 주력으로 하는 초소형차 생산을 고려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행진이 있던 그해 10월에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고 11월에 소련이 전차부대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소련은 헝가리가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하게 했고 동독에서 트라반트와 바르트부르크를 수입해서 충당하도록 했다. 결국 발라톤은 본격적으로 생산도 해 보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좌) 헝가리의 발라톤 ©작자 미상
(우) 1956년 헝가리 노동절 행진. 왼쪽 첫 번째 자동차가 발라톤, 세 번째가 이세타, 마지막 자동차가 알바 레지아다 ©작자 미상
동유럽의 자동차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굿바이, 동유럽』(책과함께, 2024)을 쓴 제이콥 미카노프스키는 “동유럽 같은 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동유럽이란 용어는 외부 사람들이 편의적으로 만들어 낸 말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어떤 말로 그 지역을 일컬을 수 있을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즉 동구권이 소련의 영향을 받고 있던 시기에도 체코, 헝가리, 폴란드 같은 나라의 사람들은 스스로 중유럽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동유럽’의 자동차 디자인은 1989년 이전의 디자인에 국한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헝가리는 이제 번듯한 승용차를 만들고 있으나 그것을 동유럽 자동차라고 보기는 어렵다. 벤츠를 비롯한 유럽 자동차 브랜드의 생산기지가 되었고, 버스를 비롯한 상용차를 생산하면서 명맥을 유지하던 헝가리 자동차 회사는 진작에 폐업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앞에서 살펴본 디자인은 지금의 자동차 디자인 기준으로 보면 무척 뒤떨어져 보이는 게 사실이다. 오래전에 디자인되고 생산된 것이니 그럴 만하다. 그런데 한국의 자동차 디자인 수준을 시발자동차나 새나라자동차의 모델로 평가한다면 우리가 수긍할 수 있을까? 눈여겨볼 것은 동유럽의 자동차들이 왜 동시대의 서유럽이나 미국과는 그렇게 다른 디자인이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다양할 수 있었는지 하는 점이다. 이렇게 관점을 달리해 보면, 성능과 생산성으로 서유럽과 단순 비교하기보다는 자동차라는 공통 사물이 서로 다른 체제 및 생활방식에서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East European Cars』(Sutton Publishing, 2000)를 쓴 줄리언 노윌은 서문에서 동유럽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재정적 한계와 재료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해야 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정치 상황의 변화로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세계 대전 이전부터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는 세계 대전에 이어 공산주의 정부 수립과 해체라는 큰 변화 속에서도 그들만의 자동차 모델을 내놓으려는 열망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계획경제의 틀에서 굳이 새로운 모델을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하면 무척 더디지만, 모터쇼에 출품하고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여한 것을 보면 새로운 자동차를 꿈꾼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잘 알지 못할 뿐이다. 소련 해체와 함께, 그들의 노력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 탓이다. 그래서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어떤 이들이 사회주의 체제의 생산물을 조롱하는 증거물 중 이질적인 자동차들의 몇몇 사진이 소환될 뿐이다.
어디 자동차 디자인뿐이겠는가. 매체에 소개되는 어떤 역사적 디자인도 철의 장막 안에서 일어난 디자인 이야기를 담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동안 우린 이 세계의 반쪽만 알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어 온 셈이다. 나머지 반쪽, 그 미지의 디자인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하나씩 풀어 보려 한다.
글 김상규 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과와 국민대 대학원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퍼시스 가구연구소에서 의자를 디자인했다. 의자를 비롯한 사물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서 큐레이팅과 아카이브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의자의 재발견』 『디자인과 도덕』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의자 디자인으로는 파트라에서 생산 중인 ‘STING’ ‘SKIN’ ‘CITY’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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