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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이모저모: 경쟁을 넘어,‘가장 쇼팽다운’ 음악만이 남았다

  • 작성자 사진: artviewzine
    artviewzine
  • 18시간 전
  • 5분 분량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지난 10월 20일(현지 시간) 막을 내렸다. 1927년 창설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건반 위의 올림픽’으로 불린다. 5년에 한 번 열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대회인 만큼, 우승자는 단숨에 세계적 스타로 떠오른다. 마우리치오 폴리니(1960), 마르타 아르헤리치(1965),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75)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쇼팽 콩쿠르 우승자는 ‘쇼팽’이라는 이름을 넘어설 때 비로소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쇼팽 외 레퍼토리로 확장해 온 우승자들이야말로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조민선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사진 제공 The Chopin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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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쇼팽만 연주하는 유일한 콩쿠르

쇼팽 콩쿠르는 한 작곡가의 전 장르를 아우르는 유일한 무대다. 참가자들은 에튀드, 녹턴, 마주르카, 소나타, 협주곡 등 쇼팽의 음악 세계를 총체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예선부터 결선까지 걸리는 기간만 6개월 이상, 심사 기준은 심사위원마다 다르지만 ‘가장 쇼팽다운 연주’여야 한다는 평가 기준은 명확하다.

올해 제19회 대회의 심사위원은 총 17명이었다. 심사위원장은 1970년 우승자인 미국 피아니스트 개릭 올슨으로, 대회 사상 처음으로 비폴란드계가 맡았다. 심사위원단에는 역대 우승자도 포함됐다. 당 타이 손(1980, 베트남), 율리아나 아브제예바(2010, 러시아), 케빈 커너(1990, 1위 없는 2위, 미국), 아르헨티나 출신 넬손 괴르네르, 줄리아드 음악원 교수 로버트 맥도널드, 폴란드 원로 피아니스트 표트르 팔레츠니 등이 이름을 올렸다. 개릭 올슨은 “예술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며 “어떤 결과는 내게도 놀랍다. 17명의 전문가가 심사에 참여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다. 그것이 경쟁과 콩쿠르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1위는 에릭 루, 쇼팽도 휩쓴 중국계 연주자

올해 결선은 유난히 치열했다. 심사위원단은 5시간 동안의 격론 끝에 중국계 미국인 피아니스트 에릭 루를 최종 우승자로 선정했다. 루는 10년 전 조성진과 쇼팽 콩쿠르 동기로 당시 4위를 차지했고, 재도전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2위는 캐나다의 케빈 첸, 3위는 중국의 왕쯔통이었다. 세 명 모두 중국계 피아니스트로, 최근 중국계 연주자들이 세계 클래식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루는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했고, 2018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슈베르트·쇼팽·슈만·브람스의 작품이 담긴 두 음반도 발매했다. 본선 3라운드에서는 손가락 부상과 감기로 경연 순서를 조정해야 했지만, 쇼팽 콩쿠르가 재도전자에게 냉정한 평가를 해 온 기조를 뛰어넘고 우승을 차지했다. 루는 우승 직후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라고 말했다. 이어 쇼팽 인스티튜트(Chopin Institute)와 가진 인터뷰에서 “콩쿠르에서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하면 안 된다. 음악계의 잡음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직 음악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음악을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 본질에 충실한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이번 도전은 그에게 필사적이었다. 10년 전 쇼팽 콩쿠르 입상자였던 그가 재출전을 선언하자 주변에서 말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재도전을 택했다. 왜일까. “10년 전 저는 너무 어리고 순진했어요. 그동안 저는 변했고, 저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기엔 전 세계 청중이 보는 쇼팽 콩쿠르가 적당했죠.”

그의 도전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이미 경력이 있는 연주자가 대회에서 지게 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압박감을 이겨 내고, 결국 그는 우승을 거머쥐었다. 『쇼팽: 폴란드에서 온 건반 위의 시인』의 저자 김주영 피아니스트는 “루는 테크닉, 소리, 음악성뿐 아니라 쇼팽과 솔직하고 순수하게 마주하는 태도까지 갖춘 연주자”라며 “결국 얼마나 쇼팽과 만나 자신의 영혼을 드러낼 수 있었느냐가 중요했다”라고 평가했다. 루는 ‘쇼팽 스페셜리스트’ 당 타이 손의 제자이기도 하다. 당 타이손은 2021년 브루스 리우에 이어 2회 연속 제자 우승자를 배출했다.

제19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루는 11월 21일 KBS교향악단과 협연, 23일 통영국제음악당,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 무대에서 한국 팬들과 만났다. 23, 26일 양일간 리사이틀에서는 에릭 루와 함께 5위를 차지한 빈센트 옹이 무대에 올랐다.

 

또 제기된 판정 논란, 점수표 공개로 일단락

제19회 쇼팽 콩쿠르 역시 심사 결과를 놓고 여진이 이어졌다. 세계 최고 영향력을 지닌 콩쿠르인 만큼 논란도 늘 뒤따르기 마련이다. 올해에는 유독 치열한 접전을 벌인 터라 최종 순위를 놓고 논란이 지속됐다. 4위를 차지한 ‘17세 별핀 소녀’ 류텐야오에 대한 과대평가 논란, 5위인 폴란드 출신 피오트르 알렉세비츠의 결과가 아쉽다는 여론이 대표적이다. 이에 쇼팽 인스티튜트는 예년보다 빠르게 심사위원단의 본선 1~3라운드와 결선 점수표를 모두 공개하며 진화에 나섰다. 점수표에 따르면 1위인 에릭 루와 2위인 케빈 첸은 불과 0.25점 차이로 순위가 결정됐다. 1라운드에서 에릭 루는 7위에 머물렀고, 최고점은 케빈 첸이 평균 22.93점(25점 만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2라운드 이후 에릭 루가 연이어 최고점을 받으며 쭉 1위를 차지했다. 결선에서는 케빈 첸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누적 평균에서 루가 근소하게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폴란드 내에서는 “폴란드 출신 심사위원이 적어 자국 피아니스트들이 불이익을 받았다”라는 지적도 쏟아졌다. 하지만 공개된 점수표에 따르면 외국인 심사위원들이 오히려 폴란드 연주자들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줬다. 류텐야오는 화제성만큼이나 점수도 꾸준히 상위권으로, 점수표에 따르면 모든 라운드에서 4~6위권을 유지했다.

결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한국의 형제 피아니스트 이혁·이효는 단연 ‘장외 스타’였다. 형제는 나란히 본선 3라운드(20인)에 진출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쇼팽 콩쿠르에서 친형제가 본선에 동반 진출한 사례는 20년 만이었다. 아쉽게도 11인의 결선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공개된 채점표는 초박빙 승부를 보여 주었다. 동생 이효는 12위(20.82)로 11위와는 단 0.02점 차이였고, 형 이혁 역시 20.29점으로 미세한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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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루는 쇼팽 콩쿠르에 10년 만에 재도전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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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에 오른 중국계 캐나다인 피아니스트 케빈 첸(사진 왼쪽)과 3위를 수상한 중국의 왕쯔통


콩쿠르 장외 스타부터 피아노 브랜드의 우승 경쟁까지

이혁·이효 형제는 결과와 별개로 뛰어난 음악성과 무대 매너,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현지 팬을 사로잡았다. 두 형제 모두 러시아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와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공부했고 프랑스 파리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을 마쳤다. 2022년 폴란드로 이주해 이혁은 프랑스 롱티보 콩쿠르 1위, 이효는 3위를 차지했다.

특히 2021년 쇼팽 콩쿠르 결선 진출자였던 이혁은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었다. 본선 3라운드 직후 그는 “이 무대가 소중하지만, 특별히 중요하다고 느끼진 않는다. 음악에만 집중할 뿐”이라며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 줬다. 또한 대회가 끝난 후 형제는 SNS를 통해 “이번 콩쿠르 무대로 쇼팽에 대한 열정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앞으로 연주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승패를 넘어 음악으로 소통하고 무대를 즐기는 새로운 세대의 모습이었다. 전 세계에서 응원 메시지가 쏟아졌고, 현지 언론 출연 요청도 이어졌다.

형제는 본선 1~3라운드에서 각자 스타일에 맞는 곡을 선택했다. 형은 소나타와 발라드에서 섬세하고 우아한 연주를, 동생은 스케르초에서 강렬한 매력을 발산했다. 두 사람은 한국어·영어·러시아어·폴란드어까지 4개 국어를 구사하며 바이올린 연주와 체스에도 능숙하다. 이효는 무대에서 현대적으로 쇼팽을 재해석했고, 조끼와 갈색 재킷으로 개성을 드러내며 관객과 소통했다. 연주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서로를 포옹하며 격려하는 모습도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은 ‘혁효 형제’는 내년 5월 28일 KBS교향악단과 풀랑크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으로 호흡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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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형제 동반 본선 진출을 이룬 피아니스트 이혁·이효는 무대 위 뛰어난 연주력과 무대 뒤 따뜻한 형제애로 클래식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외에도 여러 장외 스타들이 눈길을 끌었다. 최종 5위에 오른 말레이시아의 빈센트 옹은 시적인 표현과 개성으로 팬들의 지지를 얻었다. 본선 3라운드 진출을 놓친 한국의 이관욱도 서정적인 연주로 주목받았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쇼팽 해석자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던 콩쿠르 무대는, 단지 결과에 갇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음악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특별한 장이었다.

피아노 브랜드들의 각축전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였다. 쇼팽 콩쿠르에 협찬하는 피아노 회사들은 5년에 한 번 치열한 스폰서 경쟁을 펼치는데, 올해에는 5개사가 무대에 올랐다. 미국과 독일에 거점을 둔 스타인웨이(Steinway), 일본의 야마하(Yamaha)와 시게루 가와이(Sigeru Kawai), 이탈리아의 파지올리(Fazioli), 그리고 독일의 C. 베히슈타인(C. Bechstein)이다. 참가자들은 사전 테스트를 거쳐 자신에게 맞는 피아노를 선택한다.

올해 우승자 에릭 루는 파지올리를 선택해 정상에 올랐다. 이혁은 스타인웨이를, 이효는 시게루 가와이를 골랐다. 여전히 스타인웨이는 ‘절대 강자’다. 올해 출전한 84명 가운데 43명(51%)이 스타인웨이를 택했다. 시게루 가와이는 22명, 파지올리는 10명, 야마하는 7명, C. 베히슈타인은 2명의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흐름은 변하고 있다. 2010년 율리아나 아브제예바가 야마하로 우승한 첫 피아니스트였고, 2021년 우승자 브루스 리우는 파지올리를 선택했다. 올해 다시 파지올리 연주자가 우승하면서 파지올리는 또 한 번 강력한 홍보 효과를 거두게 됐다.

 

‘바르샤바의 축제’에서 ‘세계의 축제’로

5년에 한 번 열리는 쇼팽 콩쿠르는 폴란드 바르샤바뿐 아니라 전 세계 클래식 팬이 지켜보는 축제다. 유튜브 스트리밍과 SNS를 통해 실시간 관전이 가능하다. 결선 마지막 주자였던 일본의 구와하라 시오리의 무대는 동시 접속자 7만1,000명을 기록했다. 쇼팽 인스티튜트는 “온라인 생중계로 세계 클래식 팬을 결집했고, 역대 최다 뷰를 기록했다”라고 밝혔다. 폴란드 문화예술 TV TVP 쿨트라에서도 25만 명 이상이 결선 생중계를 시청했다.

그럼에도 콩쿠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회의는 여전하다. 세계 최고 권위를 지닌 쇼팽 콩쿠르조차 예술을 점수로 환산하는 시스템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심사위원들은 주관적 취향과 개성의 영역인 음악이 점수화되는 현실에 피로감을 드러낸다. 개릭 올슨은 콩쿠르 이후 한 인터뷰에서 “결선 1라운드에서 높은 점수를 준 8명이 모두 탈락했을 때 깊은 예술적 절망을 느꼈다”라고 털어놓았다.

이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젊은 연주자들에게 콩쿠르는 여전히 ‘첫 무대’이자 커리어의 출발점으로 기능한다.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희소한 기회인 만큼, 콩쿠르는 앞으로도 한동안 클래식 신인의 통과 의례 역할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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