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AI 시대에 부상하는 진정성의 가치: 근본이즘, 본질을 찾아서
- artviewzine
- 18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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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6시간 전
출근길에 펼쳐 보는 뉴스부터 업무 중 자동으로 정리되는 이메일, 퇴근 후 마주하게 되는 각종 콘텐츠까지 대부분이 AI의 추천과 자동화 시스템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한다. 2024년 전 세계 기업의 AI 도입률은 이미 75%를 넘어섰고, 국내 직장인 절반이 업무에 AI를 활용하고 있다. 2028년이면 일상적 의사 결정의 15%가 AI 에이전트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트렌드 코리아 2026』이 제시한 열 가지 키워드 중 가장 핵심에 놓인 개념은 ‘휴먼 인 더 루프(Human in the Loop)’다. 기술이 모든 판단을 주도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의 개입과 감성, 판단력, 그리고 본질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서 가장 강력하게 부상하는 키워드가 바로 ‘근본이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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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진짜’를 향한 회귀
『트렌드 코리아 2026』에서 제시된 키워드를 살펴보면, AI의 직간접적 영향이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로클릭’은 소비자가 답을 찾기 전에 인공지능이 먼저 선택지를 제안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AX 조직’은 AI 도입으로 조직의 고유 업무가 재정의되며, 더욱 유연하고 자율성이 높은 방식으로 운영이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레디코어’는 ‘준비(ready)’가 삶의 핵심 가치(core)가 되는 시대를 반영하는데, 이는 AI 시대의 초합리성이 생활 습관에 내재화된 현상을 뜻한다. ‘프라이스 디코딩’은 소비자가 합리적으로 가격을 해독하는 소비 행위를 가리키며, 상품 가치와 브랜드 가치가 분해되는 트렌드를 말한다. ‘픽셀라이프’는 디지털 화면의 픽셀처럼 작고, 많고, 짧게 소비하는 방식이 일상화되면서 거대 서사가 사라지고 수많은 마이크로 트렌드가 공존하는 시대상을 나타낸다.
한편, 기술 중심의 흐름 속에서도 더욱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찾으려는 움직임 역시 강하게 일고 있다. ‘필코노미’는 가장 주관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인 ‘기분’이 소비의 핵심 동력이 되는 경제를 의미한다. ‘1.5가구’는 한 개인의 자율성과 적당한 연결감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구 형태를 보여 준다. ‘건강지능’은 장수와 웰니스 시대에 삶의 질을 총체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핵심 역량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작용의 중심에는 바로 ‘근본이즘’이 자리하고 있다.
‘근본이즘’이란, AI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을 만들어 내는 시대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진본(眞本)’의 희소성에 가치를 두는 현상을 설명한다. 지난 10월 말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람객 500만 명을 돌파하며 개관 80년 만에 최다 기록을 세운 사실도 이러한 흐름을 보여 준다. 박물관 기념품 브랜드 ‘뮷즈’의 매출이 꾸준히 상승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박물관과 미술관의 주요 방문층이 디지털 네이티브인 2030세대라는 점은 더욱 인상적이다. 늘 손안의 화면으로 세상을 소비해 온 이들이 박물관을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곳은 역사를 견뎌 낸 유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진본, 디지털 이전부터 존재해 온 ‘진짜’가 모여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가상이 일상화된 시대일수록 진짜의 가치는 더욱 빛나며, ‘근본(根本)’을 향한 갈증은 이들을 자연스럽게 역사성과 희소성이 응축된 공간으로 이끌고 있다.

근본이즘의 문화적 확장
근본이즘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역사를 관통해 이어져 온 전통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전통은 더 이상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 숨 쉬는 유산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난해 경복궁, 창덕궁 등 4대 궁궐과 종묘의 관람객은 1400만 명을 돌파했다. 나쁜 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바라는 마음 또한 전통에서 답을 찾아 ‘액막이 명태’ ‘소금단지’ 같은 전통 운세나 사주 아이템이 2030세대 사이에서 선물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말린 명태에 실타래를 감아 액막이로 사용하던 옛 풍습이 현대적인 디자인과 감각을 입고 되살아난 것이다. 다이소 역시 합리적인 가격으로 근본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미니 달항아리, 한글 디자인, 자개 콘셉트의 고려청자까지 한국적인 전통 요소가 생활 속 제품으로 여전히 호흡하고 있다.
또한 ‘원조의 힘’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LG전자는 1960년 국내 최초로 출시된 선풍기 ‘D-301’을 65년 만에 현대적 감성으로 복각(復刻)했다. 원조보다 약 4분의 1 크기로 줄인 콤팩트 사이즈에 1960년대 골드스타 로고를 양각으로 새겨 넣고, 조절 기능은 다이얼 방식 그대로 유지했다. 여기에 USB-C 충전과 무 기능 등 현대적 편의성만 더했다. 복각은 단순한 레트로와는 다르다. 레트로가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이라면 복각은 과거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패키지에 적힌 ‘Rediscover the Original, Redesigned for Today’라는 문구는 단순한 스타일의 차용이 아닌 ‘원조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지를 보여 준다.

다이소는 합리적인 가격에 한국적인 전통 요소를 담은 생활용품을 선보이며 입소문을 타고 있다 © 다이소몰
LG전자는 1960년 국내 최초로 출시된 선풍기 ‘D-301’을 65년 만에 현대적 감성으로 복각해 눈길을 끌었다 © LG전자
아디다스가 1950년 출시 운동화 ‘삼바’와 1966년 ‘가젤’을 그대로 재출시해 최대 매출을 기록한 것도 같은 이유다. 20대들이 노포를 찾고, 을지로와 충무로의 야장이 인기 있는 밤문화가 된 현상 역시 ‘역사와 원조(元祖)에서 나온 실력은 진짜’라는 믿음 아래 근본을 추구하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유행을 넘어서는 클래식의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향한 갈망은 고전 문학 판매 증가로도 이어진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176년 전 출간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가 연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국내 주요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고전 문학은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자연과의 조화, 소박한 삶의 미덕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탐구하는 메시지로 여전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근본이즘은 아날로그 물건에 낭만적 가치를 더하려는 움직임으로도 나타난다. 다양한 필사집이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밴드 DAY6는 음반과 공연뿐 아니라 『가사 필사집』을 출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2025년 봄 열린 문구페어 ‘인벤타리오 2025’에는 5일간 2만5,000명 이상이 방문했다. 전시 3개월 전 판매된 얼리버드 티켓은 3일 만에 완판됐고, 전시 기간 동안의 실제 거래액도 전년 대비 4배 이상 증가했다. 아날로그 감성이 디지털 우선 시대 속에서 오히려 창작과 영감의 도구로 재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2025년 상반기 LP와 카세트테이프 관련 가맹점 이용 건수는 2023년보다 49% 증가했다. 유선 이어폰이 번거로움과 비효율을 감수하면서도 패션 아이템으로 재조명받는 현상 역시 ‘불편함조차 근본의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변화를 보여 준다.

기억에 없는 향수, 아네모이아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1936년 기술 복제를 비판하며 예술 작품의 ‘아우라(그 작품만이 갖는 고유의 존재감)’가 파괴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100년이 흐른 지금, AI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만들어 내는 시대가 되자 아우라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아우라의 핵심은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가 지닌 유일성이다.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복제의 용이함이 아니라 역사성과 진품성이다.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루브르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모나리자 앞에 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젊은 세대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아네모이아(anemoia)’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과거에 느끼는 향수(鄕愁)를 의미한다.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집단적 기억과 역사적 감수성에 기대어 작동하는 향수다. 2023년 한 조사에서는 미국 Z세대의 80%가 ‘기술 의존이 지나치다’라고 우려했고, 60%가 ‘온라인 접속 이전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답했다. 겪어 보지도 않았지만 돌아가고 싶다고 느끼는 그 시절은 곧 디지털 이전의 세계다. AI가 불확실성을 높이고 정서적 피로감을 키우는 가운데, 이들은 오래된 과거로부터 안정감과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아우라를 향한 갈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자 클레이 루틀리지(Clay Routledge)는 한 기고문에서 Z세대가 과거에 매료되는 이유를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과거를 채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특히 Z세대가 “오프라인 생활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활용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즉, Z세대의 향수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디지털 과부하와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갈망하는 일종의 저항이다. AI의 부상으로 모두의 시선이 미래로 향하고 있는 지금, 이들의 관심이 역설적으로 과거로 향하는 현상은 아우라를 향한 깊은 욕구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진정성의 전이, 근본이즘의 미래
역사가 존재하는 것에는 복제할 수 없는 가치가 깃들어 있다. 빙그레가 바나나맛 우유 50주년을 기념해 브랜드북을 발간하고, 현대자동차가 ‘포니쿠페’ 복원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어떤 기술로도 모방할 수 없는 진정성이며, 사람들의 추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근본’은 과거에 머무르는 감상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감성적 자산으로 기능한다.
근본이즘은 단순한 복고의 미학이 아니다. 시간 속에 축적된 진정성을 미래로 이식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형이 지닌 의미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탐구와 정교한 해석이 요구된다.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세대와 문화를 잇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거와 미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축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AI가 무엇이든 생성할 수 있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가 가장 갈망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켜켜이 쌓인 인간의 경험이 만들어 낸 ‘진정성’이기 때문이다.
글 I 이혜원 트렌드코리아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서울대 소비자학 학사·석사·박사. 대한출판문화협회·다산북스·리더스북·카카오페이지 등에 재직하며 얻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연령·시기·코호트 효과, 기술 발전으로 인한 행태 변화 및 문화자본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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