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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FOR THE EARTH·깊이보기] 기후위기 시대의 예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음악 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제 다 멈춘 채…”

- 그룹 샤프의 노래 ‘연극이 끝난 후’

그러면 여기서 문제, 무대 위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적이라고? 아니다. 탄소다.

 

죽은 지구에 예술은 없다

연극이 끝난 후, 감성적인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순간을 끊고 이렇게 들어올 정도로 탄소는 중하고, 기후위기는 문제고, 무대의 책임은 크다. 공연장의 탄소 배출량을 추정해 보자.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자료를 보면, 2020년 기준 공연장 한 곳당 1년에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541톤에 달한다. 공연장을 운영하기 위한 전력, 도시가스, 수도 사용량, 폐기물 배출량 등의 정보를 수집해 추정했다. ‘원래 건물은 온실가스를 내뿜는 곳이야. 관객인 나랑은 무관해’와 같은 안일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 1인당 탄소 배출량 수치도 가져왔다. 1년에 한 4번 정도 공연장을 다녀온 당신은 최대 32㎏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축제는 그보다 많은 45㎏. 축제에서 더 숨을 자주 쉬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동 거리, 이동 수단 등을 고려해 나온 수치다.

숫자들로 정신없을 때 못을 박고 시작하자면, 경험과 현장성을 중시하는 공연 예술은 기후위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죽은 지구에는 예술도, 공연도 없다.


공연 이후의 이면에 집중하기

예술은 일상에서 떨어진 쉼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든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예술의 매력이고, 기능이다. 여기에 연극이나 콘서트 같은 공연 예술은 몇 가지 특징을 더한다. 무대를 통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서 작품의 실체를 만들어 간다. 교감하는 순간을 위해선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그 공간까지 이동하고, 교감의 순간이 지난 후에는 그 자리를 지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탄소가 발생한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그 순간을 동일하게 재현할 수도 없다. ‘지금, 이 순간만 즐길 수 있다’는 공연 예술의 특징은 마치 지금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한정판 제품처럼, 무대 위 화려함과 즐거움을 위한 과감한 투자를 끌어낸다. 공연이 끝나면 버려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만든 소품, 극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조명을 위한 에너지, 배우와 관객이 공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공연장의 온도와 습도, 공연을 보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관객들이 남긴 탄소 발자국. 모두 공연을 위한 투자지만, 이런 투자로 늘어난 것은 창작진의 보람, 관객의 만족감뿐만이 아니다. 탄소 배출이 증가했고, 이는 지구 전체를 보면 희생이다.

그동안 우리는 대체로 무대 위에서 공연이 펼쳐지는 순간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우리의 시선은 무대 전과 후 그리고 무대 뒤에까지 닿게 됐고, 여러 시선이 모이자 비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공연은 좋았는데, 이건 좀 문제 아닌가? 그리고 같이 피어오르는 의문. 왜 공연 예술의 이면도 주목받게 됐을까? ‘이건 좀 아닌데’의 계기는 결국 현실에서 느껴지는 위기감이다. 가수 싸이의 흠뻑쇼. 말 그대로 엄청난 양의 물을 뿌리며 다 같이 흠뻑 젖어 즐기는 공연이다.

매년 열리지만 2022년에는 유달리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전국이 역대급 가뭄에 시달리던 상황이었기에, 한 번의 공연에 300톤의 물을 쓴다는 발언은 뒤늦게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하늘을 수놓는 축제의 상징, 불꽃놀이는 잠깐의 화려함보다 불꽃이 사라진 이후 남는 대기 오염 물질이 점점 더 주목받고 있다. 탁한 공기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번거로움과 미세먼지 수치에 대한 민감성이 커진 영향이다. 기후위기와 환경을 소재로 한 연극, 친환경 축제를 고민하는 포럼이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늘어났다. 평범한 일상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관심과 현 상황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현실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점차 분명해지는 환경적 위기감은 사람들이 더 이상 공연 예술을 예전처럼 너그럽게만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공연 예술의 가치는 변함없지만, 그 가치에 대한 공감과 응원이 지속되기 위해선 지속 가능한 공연 예술이 필요하다.


지속 가능한 무대를 위한 노력

‘지속 가능한 공연’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표현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순간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하며 마무리 지은 후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 또한 지속되는 흐름 속에 존재하고, 지속 가능성을 고민할 수 있다. 고민은 단계별로 다르고, 새로운 시도이기에 시행착오는 당연히 따라온다. 지속 가능한 공연 예술의 목적은 ‘탄소 줄이기’ ‘기후위기 대응하기’와 같이 모두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야 하는 사안이기에 경쟁은 필요 없다. 시행착오를 공유하고 더 나은 방식을 나눌 때 더 큰 유익을 얻게 된다.


영국 공연 예술 관계자들이 협력해 발간한 지속 가능한 공연 가이드라인, 『시어터 그린북』의 일부.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확인할 수 있다 © Theatregreenbook.com


신입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사용 설명서, 매뉴얼, 가이드라인이다. 다 비슷한 말이지만 강조하기 위해 열거해 보았다. 훌륭한 가이드로 꼽고 싶은 곳은 영국이다. 영국 공연 예술계는 발 빠르게 2010년부터 탄소 감축 목표를 세웠고, 2021년에는 영국 공연 예술 관계자들이 협력해 지속 가능한 공연 가이드라인, 『시어터 그린북(Theatre Green Book)』을 발간했다. ‘합의된 가치와 전략을 바탕으로, 기후위기라는 현실 속에서 공동체로서 작품을 제작하는 기준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지속 가능한 공연 제작, 공연장 관리, 운영을 위한 노력과 실천 방안을 3권에 걸쳐 정리했다. 모든 재료의 50%가 재사용 또는 재활용된 출처인지 확인하기, 장거리 이동 및 배송 줄이기 등은 ‘기초’ 단계의 실천으로 제시된 것들이지만, 그동안의 관행에 비춰 보면 새롭고 낯선 시도다. 그리고 그린북의 가이드를 상당히 성실하게 따르는 모범적인 탄소 중립 극장,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이 있다. 풍력과 태양광을 이용해 전기를 만들고, 빗물 저장 탱크에 모인 빗물을 사용하고, 무대 자재 중 절반은 재활용품을 활용한다. 작품 제작뿐만 아니라 극장, 조직 운영, 홍보 방식 등 전반에 걸친 노력 덕분에 최근 2년 연속 탄소 배출 15% 감축이라는 성과를 냈다.

국내에서도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화예술 부문의 지속 가능 가이드북을 발간했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영하고 익숙한 사례를 제시한, 친절한 안내서다. 이 안내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작품은 국립극단에서 선보인 연극 <기후 비상사태: 리허설>. 기후위기에 대한 연극을 쓰기 위해 애쓰는 작가의 이야기다. 무대 위에서는 기후위기 문제를 조명하고, 무대 뒤에서는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국립극단 창고에 있는 소품을 재활용했고, 제작을 하더라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페인팅을 하지 않았으며, 조명도 기존의 30%를 덜어 냈다. 여기에 더해 스태프가 이동에 이용한 교통수단, 연습 중 섭취한 식단 등 기획·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수치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친환경적으로 공연을 제작하도록 이끌어 주는 ‘에코 드라마투르그’가 합류한 국내 최초의 연극이기도 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발간한 『공연예술분야의 지속 가능한 창작 안내서』 중 일부


무대가 끝난 후, 처리하기 애매해지는 소품을 재활용하려는 노력도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국립극단의 공연 물품 무료 나눔 사업인 ‘빨간지붕 나눔장터’, 공연 후 사용하지 않는 무대 소품과 세트 등을 나누는 커뮤니티 ‘공쓰재(공연 쓰레기 재활용 플랫폼)’ 등이 그 예시다. 하지만 일회성으로 열리는 방식이나 수익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구조를 민간이 감당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넓은 공간에서 한 번 소품을 받아 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여와 위탁 형태로 사용의 순환을 보장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기에, 서울문화재단은 2023년 공연 물품 대여·위탁·거래 플랫폼인 리스테이지 서울을 시작했다. 현재 리스테이지 서울 창고에서는, 재단이 수집하고 개인이나 극단이 맡긴 3,000여 점의 공연 물품이 다시 새로운 무대에 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다시 돌아온 축제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모습도 흥미롭다. 친환경 축제를 선언한 춘천마임축제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었던 ‘파이어워크’를 불꽃이 아닌 LED 캔들과 알코올램프, 야광 자갈로 대체해 꾸몄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현수막과 안 쓰는 에코백으로 굿즈를 만들고 기후위기 관련 워크숍을 진행했다.


공연이 말하는 지속 가능성

앞서 지속 가능한 공연 예술의 필요성으로 무대를 위한 지구의 희생을 들었지만,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예술은 상상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에 대해 과학적인 데이터와 논리를 이용한 소통은 어느 정도 한계에 봉착했다. 호주의 사회 연구가인 레베카 헌틀리(Rebecca Huntley)는 ‘기후변화에 대해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라고 말한다. 기후변화 협의체에서 발표한 보고서가 아닌, 어린아이들이 기후 시위에서 사용한 손팻말의 문장이 더 와 닿을 수 있다. 그래프나 수치가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슬픔, 분노, 희망, 사랑 등 다양한 감정을 엮어내는 건 예술의 영역, 상상의 힘이다. 그중에서도 공연 예술은 관객을 현실에서 똑 떼어 와 어떤 상황에 놓이게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발휘해 기후위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 연극 작품들이 연이어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단이 ‘기후위기와 예술’이라는 주제로 작가와 연출가를 모집한 이유도 있겠지만, 기후위기가 최근 주목받는 소재라는 것도 맞는 설명이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희생되고 있는 멸종 위기종 갈라파고스 땅거북을 소재로 한 <스고파라갈>, 기후위기로 다가온 인류 종말의 광경을 감각적으로 구성한 <당신에게 닿는 길>, 연결된 각각의 존재가 기후위기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배우, 북극곰 그리고 물고기들>은 각각의 목소리로 기후위기를 이야기했다. 다소 낯선 형태인 강의형 연극 <에너지-보이지 않는 언어>에서는 무대 위 배우가 ‘미미하다’ ‘깨끗하다’ 등 일상적 단어가 적힌 카드들을 가지고 관객들과 ‘기후 문장’을 만들어 나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ESG 경영, 착한 소비 같은 용어가 아닌, 우리의 상상력을 편하게 불러내고 개인적으로 기후위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일상적 언어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나눴다.


기후위기 시대, 대안을 상상하는 예술

앞서 공연 제작 과정을 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공연 예술에서 가장 많은 탄소를 발생시키는 것은 관객의 이동과 극장 자체다. 배출되는 탄소량, 그 수치에만 매몰된다면 공연을 하지 않고 관객이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전, 기후위기가 지금처럼 주목받기 이전에 우리 사회가 직면했던 여러 문제에 대해 공연 예술이 해왔던 역할과 사회적 영향력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껏 그래 왔듯, 공연 예술은 기후비상사태를 사람들의 눈앞으로 가져와 과학보다 직관적이고, 숫자보다 감정적으로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예술은 힘이 있다. 탄소는 지구를 죽게 하고, 죽은 지구에는 예술도, 공연도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고, 함께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다.


조주연 TBS 보도본부 기자

과학재난팀, 지역뉴스팀 등을 거치며 기후위기 문제를 우리 일상과 연결 지어 풀어내고 있다. 공연 예술은 취미였지만, 관심을 키워 라디오 뮤지컬 코너 진행, 유튜브 문화 콘텐츠 제작 등에도 발을 담갔다. 덕업일치까진 아니고, 덕과 업의 교집합을 만들어 나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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