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시간 만에 영화 만들기, 아주 어려운 도전은 아니다. 분업화가 만개했던 20세기 중반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하루 만에 영화를 완성한 적이 있으니까. 영화 <피에타>(2012) 등으로 유명한 김기덕(1960~2020) 감독이 동료 감독 11명과 함께 장편 영화 <실제상황>(2000)의 촬영을 3시간 만에 끝낸 적이 있기도 하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좀 놀라운 일이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떨까. 스마트폰만으로도 고화질 촬영과 편집이 용이하다. 48시간 만에 ‘완제품 영화’를 만드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완성도가 문제일 뿐이다. 만약 배우 캐스팅과 시나리오 작업, 촬영, 편집 등을 48시간 만에 뚝딱 해내야 한다면? 제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해도 머리가 갸우뚱해질 만한 일이다. 게다가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오로지 컴퓨터 앞에서 일을 마쳐야 한다면 2~3년 전만 해도 다들 고개를 저었을 테지만 이제는 가능해졌다. 동영상 생성형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이 개발됐고 날로 진화하고 있어서다. AI를 활용해 앉은 자리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광고를 만드는 일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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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에서 벌어진 일
지난 7월 4~14일 열린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AI 영화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특히 부대 행사로 열린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은 AI 영화의 진화 속도를 체감할 수 있는 현장이자, 참가자들이 48시간 동안 AI 프로그램 사용방법을 익히며 단편 영화를 만든 간이 ‘영화학교’였다.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 참가 신청자는 600명가량이었다. 영화제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은 수치에 모집 정원 30명을 60명으로 급히 늘렸다. AI에 대한 영화인과 영화학도들의 열기를 확인한 만큼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참가자들은 16개 팀으로 나뉘었다. 연출·촬영·각본·미술 등 참가자들의 전문성을 고려했다. 한 팀에 감독과 촬영감독, 작가가 고루 포함되게 해 협업을 원활하게 한 조치였다.
워크숍 참가자 중에는 중견 제작자 안영진 (주)영화사 진 대표가 포함됐다. 그는 AI영화에 부정적이었다. “AI를 알아야 비판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워크숍 참가 신청서를 썼다. 하지만 최신 동영상 생성형 인공지능 프로그램 ‘런웨이 3’ 등을 접하고마음이 180도 바뀌었다. AI 영화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 대표는 ‘막차’ 팀(추가 30명에 포함된 사람들끼리 모였다 해서 지은 이름)에 속했다. 영화제 측이 참가자들에게 제시한 제작 영화 주제는 ‘환경과 SF’였다. ‘막차’팀은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돌연변이 거대 곤충들이 나타나면서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 추운 곳으로 가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북극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의 사연을 AI 영상으로 표현하려 했다. 영화명은 <설국막차>.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 현장. 참가자들은 48시간 동안 AI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혀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 BIFAN/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좌)
권한슬 감독의 AI 단편 영화 <원 모어 펌킨> © BIFAN/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우)
워크숍 첫날에는 각본을 쓰고 배우 ‘캐스팅’을 했다. 남녀 주인공 두 명은 기존 배우 얼굴에서 착안해 AI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었다. AI 배우들이 ‘연기’할 도시 배경, 배우들을 위협할 곤충 괴수들 역시 AI로 생성됐다.
둘째 날은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AI 배우들은 AI 공간에서 AI 괴수들과 뒤엉켜 연기를 했고 ‘카메라’는 이를 영상에 담아냈다. 즉, 안 대표를 포함한 ‘막차’ 팀원 4명은 자신들이 원하는 영상을 추출하기 위해 AI 프로그램에 명령어를 입력했다. 어떤 명령어를 어떻게 세세히 내렸나에 따라 영상은 각기 다르게 형성됐고 영상의 품질 역시 달랐다.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면, 예를 들어 카메라 움직임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면 AI 영상은 프로의 솜씨로 빚어졌다.
셋째 날은 AI 프로그램이 만들어 낸 영상을 보정하고 편집하는 시간을 가졌다. 색감의 통일성을 기하고 어색한 이미지를 보완하는 등의 시간을 가졌다. 안영진 대표는 “첫날은 프리프로덕션(촬영 전 준비), 둘째 날은 프로덕션(촬영), 셋째 날은 포스트프로덕션(후반 작업)을 한 꼴”이라며 “일반 영화 제작과 흡사한 과정을 밟았다”고 말했다. <설국막차>의 상영 시간은 2분. 다른 15개 팀이 만든 단편 영화 분량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에서 단편 영화 16편이 ‘뚝딱’ 만들어졌고 영화제 기간 부천아트벙커B39에서 상영됐다.
제작비 0원? 영상 산업은 이미 AI 혁명 중
48시간 동안 영화를 만드는 데 든 비용은 사실상 0원이다. 전기료와 프로그램 사용료를 제외하면 들어간 돈은 없다. 단편 영화 한 편을 만들어도 배우를 캐스팅하고 스태프를 꾸려 장비와 소품을 챙기며 촬영하는 데만도 수천만 원이 든다. AI 영화가 보편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하다. 돈이 없어 재능이 묻힐 수 있었던 수많은 인재들이 빛을 제대로 발할 수 있다.
광고라고 다를까, 최근 국내 AI 영화 총아로 떠오른 권한슬 감독은 영화뿐 아니라 광고 등 영상 산업 전반에 AI가 미칠 파급을 미리 보여 준다. 권 감독은 영화학도였다. 자신이 쓴 각본이 번번이 영화사로부터 퇴짜를 맞자 방식을 바꾸었다. 자신의 비전을 보여 주기 위해 AI로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AI 단편 영화 <원 모어 펌킨>을 만들어 지난 2월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열린 제1회 두바이국제AI영화제에서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다.
권 감독은 AI 영상 제작 스타트업 스튜디오 프리윌루전을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스튜디오 프리윌루전에는 광고 제작 문의가 잇달아 들어온다. 현대자동차도 고객 중 하나다. 스튜디오 프리윌루전은 최근 생성형 AI를 활용한 국내 최초의 동영상 광고 ‘영원히 달리는 자동차’를 완성해 현대자동차에 전달했다. 에피소드 3편으로 구성된 광고지만 제작 기간은 약 7주에 불과했다. 기존 제작 방식이라면 1편 만들 비용이 3편에 들어갔다.
AI는 과거 영상 속 간접 광고(PPL)를 바꿔 주기도 한다. 20년 전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A회사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면 AI를 통해 영상 속 소주병 라벨을 B회사 소주로 변환할 수 있게 된 거다. AI라고 만능은 아니다. 여러 권리 침해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최근 배우 스칼릿 조핸슨(Scarlett Johansson) 목소리 모방 논란이 대표적이다. 미국 AI 스타트업 오픈AI는 지난 5월 음성 기능이 추가된 생성형 AI ‘GPT-4o’를 출시하려다 무기 연기했다. 조핸슨 목소리를 무단으로 활용했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픈AI의 잘못으로 단정 지을 순 없으나 AI 시대 지식 재산권과 초상권, 음성권 침해 우려를 드러낸 일이다. 음성이든 동영상이든 텍스트이든 생성형 AI 프로그램은 기존 데이터를 바탕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 축적된 데이터로 학습을 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형성한다. 기존 지식 재산권과 초상권, 음성권들이 디지털화돼 있지 않으면 생성형 AI 자체의 존재가 불가능하다. AI 프로그램을 통해 어떤 문서, 어떤 동영상, 어떤 음성이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다면 기존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거다. AI 관련 회사들이 권리 보유자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데이터를 모으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AI 회사가 지식 재산권과 초상권, 음성권 등 각종 무형의 권리를 얼마나 존중하는지가 AI 영화 시대의 관건이다.
이동하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 대표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 관계자에게 AI가 끼칠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봤다. “사운드나 라디오, TV, 3D 영화 등이 미친 영향 중 어느 것에 가장 가깝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연극만 보던 관객들이 스크린에 투영된 영상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보다 더 클 것이다”였다. AI 영화의 등장이 영화의 탄생에 비견될 만하다는 의미다. 영화를 포함한 영상 산업이 AI의 파고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AI의 활용은 그 밖에도 무궁무진하다. 성남문화재단은 지난해 10월 제1회 성남페스티벌을 연 데 이어 올해 10월 제2회 페스티벌을 펼칠 예정이다. 구체적인 세부 내용은 아직 공개 전이지만, AI를 폭넓게 활용하는 행사가 될 전망이다. 이래저래 AI는 대세를 넘어 불쑥 우리의 삶이 됐다.
글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 전문기자
1999년 한국일보 입사 후 편집부와 사회부, 국제부 등을 거치며 엔터테인먼트팀장과 문화부장, 신문에디터로 일했다. 2004년부터 영화를 취재해 왔으며, 영국 서식스대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했다. 저서 『질문하는 영화들』 『말을 거는 영화들』, 역서 『할리우드 전복자들』로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한편, 뉴스레터 ‘영화로운’으로 매주 구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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