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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클래식] 영화 <아이언맨>과 살리에리 피아노 협주곡 C장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웅이 악당이 되기로 작정한 것일까. 최근 <아이언맨>의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악역 ‘닥터 둠’으로 마블 시리즈에 복귀한다는 외신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단지 선악이 바뀐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21세기 할리우드 흥행 기록을 작성했던 어벤져스 시리즈의 출발점이 2008년 영화 <아이언맨>이기 때문이다. 파격적 발상의 전환일까, 궁지에 몰린 마블의 마지막 승부수일까.

아이언맨 1(2008), 2(2010), 3(2013) | 감독 존 파브로(1, 2) 셰인 블랙(3) |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돌아보면 아이언맨은 마블 시리즈에서도 여러모로 독특한 존재였다. 선천적으로 초능력을 타고난 토르나 후천적 계기를 통해서 갖게 된 캡틴 아메리카와 달리, 아이언맨이 갖고 있는 능력이란 군수 산업을 통해서 축적한 천문학적 재력과 첨단 기술이 전부다. 그 결정체가 아이언맨의 장비와 슈트다.

모든 슈퍼히어로들은 인간과 영웅의 두 가지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아이언맨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 토니 스타크는 여섯 살에 엔진을 만들고 열일곱 살에 MIT를 졸업한 천재 과학자이자 군수 산업체의 CEO다. 그 회사에서 개발한 첨단 무기들을 통해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아이언맨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언맨은 이율배반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악의 세력이 사라지는 순간에 군수 산업은 존재 근거를 잃기 때문이다. “평화는 좋은 거지. 난 실직자가 되겠지만”이라는 주인공의 농담은 존재론적 역설을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다른 영웅들이 이상주의적이라면 아이언맨은 언제나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다른 영웅들이 초능력을 지니고서도 선제공격이나 살생을 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겪는 반면, 아이언맨은 적의 기지를 초토화시키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는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파괴자가 됐다”는 뒤늦은 자각에 군수 산업부의 영구 해체를 공언하지만, 실은 아이언맨 자체가 첨단 무기의 사적 전용이다. ‘마블의 아버지’로 불리는 만화가 스탠 리(1922~2018)의 말처럼 “군산 복합체의 총수라는 팬들에게 외면당할 만한 캐릭터이자 싫어할 만한 인물상을 좋아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이야말로 <아이언맨>의 남다른 역발상이자 차별점이었다.

역설적으로 아이언맨은 어벤져스 시리즈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은 변화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스탠 리의 말처럼 애초에 토니 스타크는 “억만장자 무기 제조업자로 바람둥이인 자선 사업가이면서 추하고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정신세계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자유분방한 개인주의자에서 가정을 지키는 가장으로 변모했다. 2019년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 이르면 인류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구원자적 면모를 보여 준다. 어쩌면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야말로 이런 양면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초상 © Joseph Willibrord Mahler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애초에 아이언맨 역으로 그를 염두에 뒀을 때 찬반 논란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듭된 약물 전력이 문제였다. 심지어 그에게 재활 판정을 내렸던 판사도 앞날을 우려했을 만큼 할리우드의 탕아이자 심각한 골칫덩어리였다. 하지만 배우의 인간적 결점이 등장인물의 매력을 강화하는 역설적 경우가 간혹 있는데 <아이언맨>이 그랬다. “난 영웅하고는 거리가 멀죠. 성격 파탄자에다 지금까지 저지른 수많은 잘못들”이라는 영화 대사는 주인공의 고백인지, 배우의 본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영화 <아이언맨>은 배우 자신의 영민한 자기 패러디이기도 했다. 결국 어벤져스 시리즈를 통해서 다우니 주니어는 할리우드 인기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최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스타로 부상했다. 역시 연예인 걱정은 할 필요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영화에 맞춤복처럼 들어맞는 음악 장르가 있다. ‘나쁜 남자’ 아이언맨에게 어울리는 음악은 단연 헤비메탈이다. 미군 호송 차량에 타고서 아프가니스탄의 전장을 질주하는 첫 장면부터 호주의 전설적 헤비메탈 그룹 AC/DC의 ‘Back in Black’이흐른다. 후속편 <아이언맨 2>에서도 AC/DC의 음악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면서 시리즈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정상적 사회 규범에서 삐딱하게 어긋난 주인공의 성격 묘사에 이처럼 어울리는 음악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음악은 헤비메탈이 전부는 아니다. 토니 스타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정신적 멘토이자 회사의 운영자 역할을 했던 오베디아 스탠(제프 브리지스)은 토니에게 훈계하기 위해 집에 찾아온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그가 연주하는 곡이 1773년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피아노 협주곡 C장조 가운데 2악장 ‘라르게토(Larghetto)’다. 뉴욕타임스 출신의 음악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살리에리의 이 협주곡에 대해 “훗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의 위대한 2악장을 직접적으로 예견하는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살리에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불세출의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를 질투한 나머지 살해한 것으로 묘사되는 범인(犯人)이자 범인(凡人)의 대명사다. 평소 접할 일이 드문 이 곡을 영화에서 굳이 사용한 이유는 자명하다. 지금 이 곡을 들려주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영화적 암시다. 간혹 영화에서 음악은 이야기 전개보다 한발 앞서서 사건의 단서를 전달하는 언외언(言外言)의 역할을 한다. 지금도 여전히 살리에리에 대한 그릇된 편견은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가운데 진짜로 억울한 건 누구일까.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고 『365일 유럽 클래식 기행』 『시네마 클래식』 『모차르트』 『씨네 클래식』 등의 저서가 있다. 다양한 강연과 해설 무대는 물론, 유튜브 채널 ‘클래식 톡’을 통해 클래식과 대중의 간극을 줄여 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사진 제공 파라마운트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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