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토토는 불우하다. 그는 이웃 부잣집 동갑내기 알프레드와 삶이 바뀌었다고 믿는다. 둘이 아기였을 때 병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생이 뒤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알프레드 아버지 부탁으로 비행기 조종간을 잡았다가 실종되자 알프레드에 대한 미움은 더 깊어진다. 토토는 사랑하는 누나를 알프레드 때문에 잃었다고 여기기도 한다. 토토의 불행은 이어진다. 토토는 다 알프레드 탓이라 생각한다.

ⓒ Jimmy Kets 외롭고 가난한 노인으로 회한의 삶을 돌아보니 알프레드가 더더욱 밉다. 토토는 막대한 부를 쌓은 알프레드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토토의 인생을 오히려 부러워한다. 돈 때문에 암살 위험에 놓여 있어서다. 토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프레드가 돼 살기로 한다. 그는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죽은 후 재가 돼 하늘에 뿌려진 후 즐거움에 겨워 한껏 웃는다. 토토의 삶은 불행했을까, 아니면 행복했을까.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불우하다
벨기에의 자코 반 도마엘(Jaco van Dormael, 1957~) 감독은 장편 데뷔작 <토토의 천국>(1991)부터 인생의 불가해를 다룬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불우하다. 삶을 비관해도 될 만한 환경에서 자라고 불행의 연속 속에 삶을 이어 간다. 두 번째 장편 영화 <제8요일>(1996)의 등장인물도 마찬가지다. 중년 남성 아리는 직장에서는 인정받는 일중독자이나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다. 아리가 우연히 마주치는 다운증후군 청년 조지는 외톨이다. 어머니를 잃었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 하지만 두 남자 아리와 조지가 만나 빚어내는 감정은 불행보다 행복이 많다. 아리는 조지를 매개로 가족과 화합한다. 조지는 스스로 삶을 마친다. <제8요일>의 끝은 해피 엔딩일까, 새드 엔딩일까.
그의 세 번째 영화 <미스터 노바디>(2009)는 어떤가. 주인공 니모는 118세 할아버지다. 시대는 2092년, 유전 공학의 발달로 더 이상 죽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영세를 누리는 시대에 니모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가 기자에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다. 그의 과거는 복잡하다. 세 여자와 각기 달리 결혼해 세 가지 삶을 살았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 그가 인생에서 한 선택들을 후회해서 만약을 적용해 상상해 본 삶들일 수 있다. 수수께끼 같은 회고담을 남기고 니모는 미소 지으며 숨을 거둔다. 인류 역사상 마지막으로 죽게 된 그는 왜 웃었을까, 후회로 점철됐을 만한 삶을 돌아보며 그는 왜 울지 않았을까.
1 영화 <토토의 천국> 2 영화 <제8요일>
도마엘의 영화에 있는 것: 유머, 초현실, 음악
네 번째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에서는 신의 딸 에아가 스크린 중심에 선다. 사람들의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에아의 아버지는 가정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못된 가부장이다. 에아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면서 영화는 본 궤도에 오른다.
도마엘 감독 영화 속 인물들은 불우하다고 하나 그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 살지 않는다. 노년의 토토처럼 인생 막바지에 삶의 비의를 깨닫거나 아리와 조지처럼 우정으로 삶의 환희를 되찾기도 한다. 또는 니모처럼 말년에 병상에서 삶이라는 시련을 음미하거나 에아처럼 불우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절대자 아버지에게 맞선다. 도마엘 감독은 인생은 슬프고 불행해도 역설적으로 종국엔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물론 개인이 인생에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달리겠지만(도마엘 감독은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가 한 “자신의 인생을 살되, 인생이 자신을 살게 하지 말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한다).
도마엘 감독이 영화 속에서 비관의 정조를 낙관의 정서로 바꾸는 도구는 유머와 초현실과 음악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슬픔이 스크린을 지배하려 할 때 엉뚱한 웃음이 등장하고는 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장면이 종종 화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음악은 감미롭거나 활기찰 때가 많다. 묵직한 튜바 음이 긍정의 신호를 내뿜거나 발랄한 팝송이 귓가를 맴돈다.
복잡다단한 삶… 그래도 살 만하고 희망은 있다
도마엘 감독이 연출한 장편 영화는 4편이다. 세계 영화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온 이로선 과작(寡作)이다. 그는 <토토의 천국>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장편 영화 연출이 2회 이하인칸 영화제 초청 모든 감독을 대상으로 함)을 수상했고, <제8요일>로는 다니엘 오테이유와 파스칼 뒤켄에게 남자배우상을 안겼다. <미스터 노바디>는 베니스 국제영화제 기술공헌상을 받았으며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벨기에 안팎에서 투자받기에 충분한 이력이다.
도마엘 감독이 과작인 건 그가 숙성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서다. <미스터 노바디>만 해도 <제8요일> 이후 1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었다. 그는 <미스터 노바디>의 시나리오 작업에만 7년을 들였다. 그의 영화들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단순하게 전하는 것을 넘어 삶의 복합적인 느낌을 장면마다 표현해 낼 수 있는 건 아마 오랜 시간 생각을 다듬고 다듬은 결과가 아닐까.
도마엘 감독은 2010년 <미스터 노바디>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을 때 기자를 만나 적은 작품 수에 대해 ‘자학 개그’를 하기도 했다. “아마 나중에 손주들에게 제 영화를 다 보여 주는 데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할아버지는 도대체 뭘 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 듯해요.”
도마엘 감독이 2010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에피소드 하나 더. 그는 “딸이 추천해 준 한국 영화를 본 후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며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이유”라고 밝혔다. 도마엘 감독은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가 말한 내용으로 추정컨대 태국 영화 <시티즌 독>(2004)이었다. 그가 <시티즌 독>을 한국 영화로 착각해 부천을 방문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때로 인생은 오해와 착각과 망상으로 불행이 행운으로 변환될 수도 있으니까. 도마엘 감독의 영화처럼 말이다. 그가 태국 영화를 한국 영화로 잘못 알고서 한국을 찾은 후 여러 인연들을 맺고 즐거움을 만끽했다면 불운인가, 행운인가.
도마엘 감독은 무용과 연극, 영화 등 여러 요소가 뒤섞인 이색 공연 <콜드 블러드>를 12월 13~14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선보인다. 2014년 <키스 앤 크라이> 이후 10년 만에 한국 무대에 오르는 도마엘 감독의 새 공연으로, <키스 앤 크라이>처럼 아내인 안무가 미셸 안느 드 메이와 함께 꾸민 무대다. 섬세한 손가락 움직임으로 인생을 묘사하게 될 <콜드 블러드>는 국내 관객들에게서 어떤 감정들을 불러낼까. 확실한 건 한 단어로 콕 집어 표현해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정서가 관객들 마음에 새겨질 거란 점이다.
글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 전문기자
1999년 한국일보 입사 후 편집부와 사회부, 국제부 등을 거치며 엔터테인먼트 팀장과 문화부장, 신문에디터로 일했다. 2004년부터 영화를 취재해 왔으며, 영국 서식스대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했다. 저서 『질문하는 영화들』『말을 거는 영화들』, 역서『할리우드 전복자들』로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한편, 뉴스레터 ‘영화로운’으로 매주 구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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