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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디자인] 활자 진화의 역사: 왜 다양한 글꼴 디자인이 필요한가

거리를 걷다 보면 수많은 간판과 그 다양한 글자 모양들이 매우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한국의 간판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하지만 상점 주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글꼴로 간판을 만들고 싶지 않겠는가. 간판의 글자가 이토록 다양해진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활자화된 한글의 글꼴은 대개 본문용이어서 간판에 사용하는 글자는 직접 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본문용 활자’란 가독성이 높은 평범한 디자인의 글자다. 반면에 ‘간판용 활자’는 좀 더 눈에 띄도록 디자인한다. 서양에서도 산업혁명 이후에야 간판용, 정확히 말해 ‘디스플레이 활자(크고 독특한 형태의 제목용 활자)’들이 태어났다.


모던 로만체는 기존의 로만체보다 획의 대비가 크고 세로획과 세리프가 직각으로 만난다

1 고딕체. 450년대 태어난 서양 최초의 활자는 바로 이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 2 금속 활자. 컴퓨터가 태어나기 전에는 글자를 찍어 내려면 반드시 물질적인 활자가 필요했다 3 슬랩 세리프는 획의 모든 굵기가 일정한 글꼴이다


고딕체에서 시작된 활자의 진화

자 어떤 과정을 거쳐 활자가 다양한 디자인으로 꽃을 피우게 됐을까? 활자(活字)란 손으로 쓰인 것이 아닌, 기계적인 방법으로 글자들을 대량으로 찍어 내기 위한 만든 특정한 모양의 금속 글자 틀을 의미한다. 지금은 디지털화되어 물리적인 활자가 필요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글자를 종이에 찍어 내려면 반드시 물질로 된 활자가 필요했다.

서양에서는 1450년대에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금속 활자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는 어떤 디자인으로 활자를 만들었을까? 당시 중세 유럽에는 채식필사본(彩飾筆寫本)이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들은 주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글자와 그림을 손으로 일일이 쓰고 직접 그려서 만든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천 페이지가 넘는 성서 주석서 같은 경우 완성하는 데 4~5년이 걸리기도 했다. 책의 글씨를 쓰는 전문가를 ‘필경사(Copisti)’라고 불렀다. 한 권의 책은 여러 필경사들이 함께 작성했지만, 그들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동일한 글씨체를 유지하기 위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중세의 채식필사본은 모두 비슷한 모양의 글자로 디자인되어 있으며, 이 글씨체를 ‘고딕체(Gothic Type)’라고 부른다.

구텐베르크는 자연스럽게 이 글씨체를 바탕으로 활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최초의 라틴 알파벳 활자는 바로 고딕체다. 고딕체는 고딕 성당을 닮아 획의 끝이 뾰족하고 획의 굵기가 굵은 특징이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읽기 쉬운 글씨체가 아니지만 당시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트라야누스 원주(1세기) 에 새겨진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글자 모양은 로만체 대문자의 바탕이 되었다

2 카롤링거 소문자(8세기)는 로만체 소문자의 바탕이 되었다

야만에서 우아함으로, 로만체의 탄생

독일 지역에서 발명된 인쇄술은 르네상스를 맞이한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더욱 발전한다. 특히 베네치아는 15세기에 인쇄술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이탈리아의 인문학자들은 독일에서 건너온 이 혁명적인 기술을 반기면서도 그 활자 모양은 좋아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후예로서 문화적 자존심이 강한 이탈리아인들은 알프스 북쪽의 민족들을 모두 야만족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트족(Goths)은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야만족이다. 따라서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이 갈리아족 프랑스, 게르만족 독일이 만든 건축 양식에 ‘고딕(Gothic)’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경멸과 멸시를 담은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말에서 ‘오랑캐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특히 고딕 건축의 뾰족한 첨탑에서 야만성을 느꼈는데, 구텐베르크가 디자인한 고딕체 역시 뾰족한 것이 특징이어서 이 야만스러움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활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탈리아 인문 학자들이 새로운 활자를 디자인하고자 찾은 전통은 로마 시대에 만든 트라야누스 원주(기념탑의 일종) 같은 기념물이나 판테온 등 신전 건축, 바실리카 같은 공적인 건물의 입구에 쓰인 글자다.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의 업적을 기린 이 기념물에 쓰인 비문(碑文)은 로마 시대 건축만큼이나 조화롭다. 이런 기념물의 글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활자의 대문자를 디자인했다.

이 비문이 만들어진 시대에는 소문자가 없었기에, 소문자는 다른 참고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 8세기 말 프랑스 수도원에서 발전한 카롤링거 소문자(Carolingian Minuscule)가 그 예이다. 손으로 쓴 이 소문자체는 이탈리아에도 퍼졌고, 15세기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은 이를 자신들의 유산으로 여겼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새로운 활자체가 바로 로만체(Roman Type)다. 오늘날 우리가 영문 본문체로 알고 있는 바로 그 글꼴이다.

검정색이 지배적이어서 ‘블랙레터’라는 별칭이 붙은 고딕체와 달리 흰색 여백이 많은 로만체는 ‘화이트레터’라고도 한다. 새 글꼴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고딕체보다 가독성이 훨씬 높아서 그 뒤 유럽 모든 곳의 인쇄소로 퍼진다. 단 독일 지역에서는 고딕체를 20세기 초반까지도 본문체로 사용했다. 특히 히틀러와 나치는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자 더욱 고딕체를 고집했다. 오늘날에도 고딕체는 독일적인 성질을 갖고 있어서 카스, 하이트, 클라우드 같은 국내 맥주 브랜드들은 ‘맥주는 독일이 최고’라는 인식에 따라 고딕체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로고를 사용한다.

1 모던 로만체는 세련된 특징 덕에 패션 잡지의 제호 디자인으로 많이 채택되었다. 획의 대비를 더욱 극단 적으로 밀어붙여 얇은 획의 두께가 사라져 아예 선이 되었다

2 산업혁명 시대에 태어난 팻페이스는 최초의 디스플레이 서체로 평가받는다

산업혁명이 불러온 활자 혁신

한편,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역에서는 로만체가 점차 발전했다. 초기 로만체는 사람의 필체를 닮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기계적인 형태로 변해 갔다. 17세기 말,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보도니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디도는 새로운 형태의 로만체를 개발했다. 이 새로운 로만체는 굵은 획과 가는 획의 대비가 매우 크며, 세리프(획의 시작과 끝 부분에서 돌출된 작은 선)와 획이 직각에 가깝게 만나고, 대부분의 선이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기존의 로만체보다 훨씬 기계적인 느낌을 주어 ‘모던 로만체’라고 불렸다. 모던 로만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주며, 이로 인해 패션 잡지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18세기까지 유럽의 인쇄소들은 이러한 본문용 로만체만을 사용해 모든 책을 제작했다. 글꼴 디자인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제품을 여러 지역으로 유통하고 모르는 다수의 소비자에게 판매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광고와 홍보가 필요해졌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대도시 거리들은 포스터 전시장으로 변모했다. 포스터를 제작하는 인쇄소에서는 이제 큰 활자뿐만 아니라 사람의 시선을 끌고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글꼴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1803년, 영국인 로버트 손은 대단히 파격적인 활자를 발표한다. 그것은 모던 로만체에서 굵은 획을 더욱 두껍게 만든 디자인이다. 굉장히 뚱뚱해 보여서 ‘팻페이스(Fatface)’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디스플레이 서체로 기록된다. 디스플레이 서체는 주로 포스터, 책 표지, 간판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만든 활자로, 가독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강한 호소력을 가진 글꼴이라 할 수 있다. 팻페이스가 등장하자 디스플레이 서체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입체적인 글꼴, 글자를 흰색으로 하고 바탕을 검정색으로 반전시킨 글꼴, 글자 안에 꽃을 그려 넣은 화려한 글꼴 등이 그것이다.

또한, 획의 굵기 대비가 없이 일정한 슬랩 세리프(Slap Serif)와 세리프를 아주 장식적으로 쓰는 ‘투스칸 스타일(Tuscan Style)’도 등장했다. 슬랩 세리프와 투스칸 스타일은 영국에서 탄생했으나, 미국에서 오히려 큰 인기를 끌며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대표적인 글꼴로 자리 잡았다. 서커스 포스터나 현상금 포스터 등에서 슬랩 세리프와 투스칸 스타일 글꼴을 흔히 볼 수 있었고, 과거 미국 국가 대표팀의 로고, 아이비리그 대학의 재킷 글씨, 메이저리그 야구단의 로고 등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대학교 밤버 재킷 (bomber jacket)에 적용된 슬랩 세리프. 한국 대학의 이른바 ‘과잠(과잠바)’도 미국의 전통을 따라 모두 슬랩 세리프로 디자인된다

모더니즘과 디스플레이 서체의 시대

19세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활자 디자인이 탄생했다. 바로 세리프*가 없는 글꼴이다. 사람들이 글을 쓸 때에는 세리프 없이 쓰지만, 활자에서는 세리프가 있는 것이 기본이었다. 활자가 발명된 이후 350년이 넘도록 세리프 없는 글꼴은 디자인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1816년에 영국의 윌리엄 캐슬론(William Caslon) 4세가 처음으로 세리프 없는 글꼴, 즉 ‘산세리프(SanSerif)’를 발표했다. 당시 19세기 사람들에게 산세리프는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에, 이를 ‘그로테스크(Grotesque)’라고 부르기도 했다.

장식적인 투스칸 스타일은 19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글꼴이 되었다

건축과 가구를 비롯한 모든 디자인 분야에서 장식이 당연시되었던 19세기 유럽인들에게 산세리프는 장식이 없이 아주 밋밋해 보이는 글자여서 인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20세기의 모던 디자이너들은 장식을 무척 싫어했다. 간결한 산세리프는 드디어 디자이너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모더니즘이 전세계에 정착하자 산세리프체는 드디어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고,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글꼴로 자리 잡았다.

산세리프체는 세리프가 있는 로만체보다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판독성은 뛰어나다. 가독성은 책을 읽을 때 문장이 잘 읽히는 정도이고, 판독성은 개별 글자가 잘 식별되는 정도다. 따라서 산세리프는 문장보다는 단어 위주로 짧게 쓰는 교통 표지판, 기차역이나 공항과 같은 공공장소의 표지, 포스터 제목 등에 적합한 글꼴이다. 특히 산세리프 글꼴 중 헬베티카(Helvetica)는 스위스에서 탄생하여 20세기에 가장 널리 쓰인 활자가 되었다. 컴퓨터 자판에도 산세리프 글꼴이 사용된다.


1 투스칸 스타일은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의 로고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2 뉴욕 지하철 표지판에 적용된 산세리프인 헬베티카. 20세기에 가장 많이 쓰인 글꼴이다

이처럼 19세기 이후 광고의 요구로 글꼴은 폭발적으로 다양해졌다. 한글 활자의 경우 기계화가 서양보다 훨씬 늦은 만큼 디스플레이 서체는 아주 뒤늦게 태어났다. 게다가 한글 글꼴 디자인에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라틴 알파벳은 대소문자를 합쳐 52자만 디자인하면 되지만,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은 2,300개 이상의 글자를 디자인해야 한다. 물론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한글 디스플레이 서체들도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 디자이너가 개발한 서체만으로는 적합한 걸 찾지 못해 캘리그래피(손으로 쓴 글씨)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영화 포스터나 식품 패키지를 보면 캘리그래피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디스플레이 서체가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본문용 서체만으로는 표정과 인상이 풍부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글자는 획의 길이와 두께, 획 사이의 대비, 직선과 곡선의 차이 등으로 마치 사람 얼굴의 변화만큼이나 다양한 표정과 인상을 만들 수 있다. 브랜드와 상품, 가게, 식당 등 저마다 자기만의 고유한 디자인을 갖고 싶어 하는 한 앞으로도 다양한 글꼴들이 디자인될 것이다.

*세리프

활자에서 글자와 기호를 이루는 획의 일부 끝이 돌출된 형태를 가리킨다. 세리프가 있는 글꼴은 세리프체(serif typeface, serifed typeface), Serif Sans-Serif 세리프가 없는 글꼴은 산세리프체(sans-serif)로 부른다. 김신 디자인 저널리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월간 <미술공예> 기자를 거쳐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2011~13년에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있었다. 2014년부터 칼럼니스트로 독립해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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