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손가락들이 펼치는 서정적인 춤과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촬영해 보여 주는 독특한 형식의 공연 <키스 앤 크라이>. 정교한 미니어처 세트에서 섬세하게 재현된 이미지들이 애틋한 사랑의 기억을 끄집어냈던 이 작품은 전 세계 20여 개국에 소개되어 꾸준한 사랑을 받았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에 초연되어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올겨울 성남아트센터를 찾아오는 <콜드 블러드>는 10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키스 앤 크라이> 창작진이 선보이는 또 다른 명작이다.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7가지 기억을 다채롭고 생생한 감각으로 무대 위에 펼쳐 낸다.

ⓒ Julien Lambert
<키스 앤 크라이>가 지나간 ‘사랑’의 추억과 옛 연인의 기억을 씨줄과 날줄 삼아 엮어 내었다면, 이번 작품 <콜드 블러드>를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는 ‘죽음’이다. 기상 악화로 인한 항공기 추락사, 빗길을 달리던 자동차 사고사, 급작스런 폭설로 인한 실종사, 질병으로 인한 급사, 우주 비행사의 사고 등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일곱 가지 마지막 순간들이 무대 위에 다채로운 방식으로 구현된다. <키스 앤 크라이>에 이어 이번에도 대본을 쓴 작가 토마 귄지그(Thomas Gunzig)는 내레이션을 통해 달콤한 죽음, 잔혹한 죽음, 끔찍한 죽음, 때 이른 죽음 등 가지각색 죽음의 양상을 열거하면서, 죽음 또한 삶과 같아서 서로 똑같은 죽음은 없음을 상기시킨다.
<키스 앤 크라이> 무대가 한 여인이 사랑했던 5명의 연인에 대한 기억을 각기 다른 에피소드로 그려 냈다면, <콜드 블러드>에서는 예상치 못한 죽음에 관한 7개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펼쳐진다. 이렇듯 하나의 주제를 반복, 변형하면서 다수의 예시 혹은 서로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은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로, 영화 <미스터 노바디>에서는 주인공의 수많은 선택으로 인해 갈라진 여러 버전의 인생을 보여 주기도 했다.
ⓒ Julien Lambert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이 펼쳐 내는 생의 감각
무대 위에는 연달아 죽음이 펼쳐지지만, 사실 <콜드 블러드>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순간, 생과 사의 경계가 갈리는 그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오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거라 믿지만, 무대 위 인물들은 죽음을 맞이한 순간 오직 하나의 장면만을 떠올린다. 또한 그것은 결혼식이나 졸업식 같은 중대한 사건도, 트로피나 메달 같은 영광의 기억도, 부모 형제나 연인 같은 구체적인 인물도 아니다.
죽음의 순간 이들이 떠올리는 것은 어느 오후 바닐라 향이 나던 보드라운 살결, 한여름에 갓 베어낸 풀 냄새,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 정원에서 마시는 아몬드 우유의 맛과 같은 선명한 감각들이다. 대부분 색깔과 냄새, 소리, 맛과 촉감 등 오감을 통해 기억된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구현되면서 삶의 한순간을 끄집어낸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죽음’의 감각이라기보다는 ‘삶’의 감각에 가깝다.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서 이들은 모두 가장 선명한 삶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자코 반 도마엘은 공연뿐만 아니라 <토토의 천국> <제8요일> 등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영화감독이기도 한데, 그의 작품에서 죽음과 삶은 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토토의 천국>과 <미스터 노바디>는 모두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지나간 삶을 반추하며 회상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영화들이다. 또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는 전 세계 사람들이 각자 죽음까지 남은 시간을 문자 메시지로 전송받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죽게 될 시간을 알게 되자 비로소, 스스로 원했던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코 반 도마엘의 작품에서 죽음은 항상 삶을 비추고 삶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역할을 해 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콜드 블러드>에 등장하는 7번의 죽음 역시 결국은 7개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작은 것들이 만드는 큰 울림
<키스 앤 크라이>에서 손가락만으로 다채로운 감정의 스펙트럼을 선보였던 안무가이자 도마엘 감독의 아내이기도 한 미셸 안느 드 메이는 이번 공연에서도 안무와 실연을 맡아 놀라운 손가락 연기를 펼친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니어처 속에서 그녀의 손과 손가락은 살아 있는 인물처럼, 때로는 그 이상으로 섬세한 감정의 결을 펼쳐 내면서 고독과 절망 같은 절절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한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고전 뮤지컬 영화와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 무대가 오마주처럼 삽입되었는데, 반짝이는 망사를 두른 채 현란한 탭 댄스를 추는 손가락 커플과 새빨간 테이블 위에서 박력 있게 <볼레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네 개의 손은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정교한 미니어처 세트 속에서 손가락과 소품, 조명과 특수 효과가 만들어 내는 작은 세계는 실시간 촬영 중인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무대 위 스크린에 투사되는데,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확대된 미니어처 세트와 손가락은 완전히 다른 질감과 거대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연출을 비롯해 모든 창작진은 이 모든 실연과 촬영 현장을 동시에 보여 줌으로써 실재가 어떻게 이미지화되는지 그 과정을 노출하고, 이를 통해 현실과 기억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하나의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이어질 때마다 미니어처 세트와 카메라 앵글, 출연진의 위치 및 동선이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전환되는 와중에도 스크린 속 화면들이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놀랍기 그지없다. 인형 조종과 카메라, 세트 배치와 특수효과, 조명과 내레이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스태프들이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호흡과 협동으로 실연과 촬영을 진행하는데,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훈련이 뒷받침되었을지를 생각하면 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장면들은 모두 이들의 정직한 땀과 노력이 빚어내는 마법과 같다.
무대와 스크린을 넘나드는 연출
막이 오름과 동시에 시작되는 카메라 촬영은 막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면서 마치 무대 위에서 영화 한 편을 오롯이 찍어 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덕분에 관객은 무대 위 세트에서 펼쳐지는 분주한 움직임과 이를 따라다니는 카메라, 그리고 그 결과로 비치는 실시간 영화까지 여러 층위의 볼거리를 마주하게 되는데, 특히 스크린 위에 투사되는 영상은 다른 걸 포기하고 이것만 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 자코 반 도마엘은 공연 전체를 지휘하는 연출가인 동시에 각 장면에서 실시간 촬영되는 영상을 총괄하는 영상 감독이기도 한데, 실제로 공연 내내 실시간으로 보이는 카메라의 앵글과 구도에서는 도마엘 감독 특유의 시선과 미학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대 위에서 스크린과 실연의 장르를 넘나들듯이, 무대 밖에서도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은 영화와 공연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흔적을 남긴다. <키스 앤 크라이>와 <콜드 블러드> 같은 공연에서는 무대 위에 무성영화의 장면들을 들여오고, 자신의 영화인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는 손가락 춤과 미니어처 장면 등 공연의 일부를 재현하기도 했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삶과 죽음이 서로를 비추듯이, 형식적인 지점에서는 영화와 공연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를 비춤으로써 대상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자코 반 도마엘의 일관된 방향성이라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번 공연 <콜드 블러드>는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되새기는 그의 주제 의식을 생생한 감각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막이 내리고 극장에 불이 들어온 뒤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긴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Julien Lambert
*12월 13일(금)과 14일(토),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콜드블러드>를 만날 수 있다. 배우 유지태가 2014년 <키스 앤 크라이>에 이어 이번 <콜드 블러드>에서도 한국어 내레이션을 맡았다. 글 김주연 연극 평론가
월간 <객석> 기자로 출발해 공연과 문화에 관련된 글쓰기와 강의, 드라마터그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저서로 『페테르부르크 막이 오른다』와 『슬라브 막이 오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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