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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 1] 이자벨 위페르의 <메리 스튜어트>: 모노드라마, 그 이상의 무대

로버트 윌슨 연출,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연극 <메리 스튜어트>는 배우 한 사람이 오롯이 전체 공연을 이끌어 가는 모노드라마이다. 그러나 지난 11월 1, 2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무대 위의 배우는 이자벨 위페르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김주연 연극 평론가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무대 전체를 압도한 채, 시시각각 색채와 밝기, 명도와 채도가 변화하면서 메리 스튜어트의 심리적 상태와 변화를 암시하고, 때로는 읊조리고 때로는 절규하는 이자벨 위페르의 대사 사이사이에 마치 대꾸하듯 끼어들며 극 전체를 거대한 빛의 대화로 이끌어 간 조명이 또 하나의 배우로서 열연을 펼쳤다. 실제로 로버트 윌슨은 예전부터 늘 “나의 무대에서 빛은 하나의 배우로 기능한다”고 말할 만큼 빛과 조명에 예민한 연출가인데, 이번에도 아무런 무대 세트나 소품도 없는 텅 빈 무대를 오로지 빛과 조명으로 가득 채우면서 메리가 놓인 상황과 그녀의 복합적인 감정의 결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냈다.

© Lucie Jansch


빛과 어둠 사이의 드라마

무대 위에서는 오로지 두 개의 선이 평행선처럼 빛나고 있고, 메리 스튜어트는 두 개의 선 사이에서 모든 독백과 춤 그리고 움직임을 펼쳐 나간다. 평행하게 이어져 있는 두 개의 선은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공간일 수도 있고, 내일이면 처형될 메리 스튜어트의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 같기도 하다. 또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그녀의 운명과 스스로 선택한 의지 사이의 간격을 상징하기도 하고, 터질 듯한 분노와 슬픔을 쏟아내는 감정선과 차분하게 자신의 생을 돌아보는 이성의 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떤 인간적인 색채도 없이 차갑게 빛나는 두 개의 평행선 사이를 메리는 끊임없이 오가며 드라마를 쓴다. 그녀는 그 사이에서 고백하고, 편지를 쓰고, 춤을 추고, 때로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거침없이 사선으로 무대를 가로지른다. 마치 그림처럼 꼿꼿하고 처연하게 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가 하면 격정에 사로잡혀 두 팔을 휘두르며 반복되는 문구들을 부르짖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는 삶과 죽음, 운명과 의지, 이성과 감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온몸과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생을 다시 쓰고, 관객으로 하여금 두 개의 끝없는 평행선 사이에 놓인 그녀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 Lucie Jansch

또 다른 주인공, 음악

빛과 조명 그리고 그 아래에 서 있는 배우가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섬세한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그려 냈다면, 이 공연의 또 하나의 숨은 배우인 음악과 음향은 대본과 대사가 말해 주지 않는 서사를 담당하면서 무대 위에 한 편의 드라마를 청각적으로 구현해 냈다. 이탈리아 작곡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가 작곡한 강렬하고 고풍스러운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서사성을 간직한 채 드라마를 이끌어 나간 일등 공신이었다. 1장부터 3장까지 끊임없이 쏟아 내는 메리 스튜어트의 대사들이 파편적이고 분열된 언어와 문구들로 반복되는 반면, 장엄하게 시작되어 극도의 긴장감을 만들어 내다가 고요하고 차분하게 가라앉는 음악적 풍경은 주도적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면서 메리의 삶과 운명 그리고 죽음 앞에 선 그녀의 영혼을 생생한 음향과 극적인 선율로 펼쳐 내었다. 또한 노래하듯, 주문을 걸듯 반복되는 대사들은 그 자체의 의미를 전하기보다는 반복되고 중첩되면서 쌓이는 언어적 리듬을 통해 메리의 내면을 청각적인 풍경으로 그려 냈으며, 녹음된 대사와 배우의 라이브 대사가 대화하듯 언쟁하듯 이어지는 구조는 메리의 과거와 현재를 무대 위에 동시에 재현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 Lucie Jansch

단연코 압도적인 위페르의 존재감

한 시간 반 동안 오롯이 홀로 거대한 오페라하우스 무대 공간을 장악한 채, 노래하듯 기도하듯 절규하듯 쏟아지는 수많은 대사를 온몸으로 소화해 내며 극을 이끌어 간 이자벨 위페르는 과연 그 명성 그대로 압도적인 존재감과 연기력을 확인시킨 명배우였다. 가녀린 체구에서 포효하듯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와 함께, 살짝 비튼 목선과 손짓 하나만으로 수많은 감정을 담아 내는 그녀의 섬세한 표현력에 관객들은 숨소리 하나 없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보이지 않는 배우로 활약하면서 극의 서사와 심리를 시청각적 요소를 통해 펼쳐 낸 빛과 조명 그리고 음악은 각각의 요소들을 하나의 태피스트리처럼 엮어 내는 로버트 윌슨의 탁월한 감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면서 깊고 선명한 각인을 남겼다.


이자벨 위페르의 <메리 스튜어트>

일시 | 11월 1일(금) 오후 7시 30분, 2일(토) 오후 3시

장소 |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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