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손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스마트폰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부터일까, 어느새 책 읽기는 귀한 습관이 됐다. 지난 4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약 6명이 1년간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도서를 한 권이라도 읽거나 들은(오디오 북) 성인의 비율을 의미하는 ‘종합독서율’은 43%에 그쳤다. 첫 조사를 시작한 지난 1994년에는 이 비율이 86.8%에 달했다고 하니 거의 반 토막이 난 셈이다.

© 문학동네
그런데 이런 엄혹한 독서 멸종의 시대에 희망적인 이야기가 들려온다.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으로 통하는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 사이에서 책 읽기가 근사한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텍스트 힙’ ‘독서 힙’이라는 신조어로 요약된다.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멋있는’ ‘개성 있는’이라는 뜻의 ‘힙(hip)’을 합친 단어다.

성수동의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에 등장한 시집 팝업 공간 ‘더 포에트리 하우스’. 출판사 ‘문학동네’와 협업한 이 공간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 문학동네
팝업의 성지에 시집의 등장이라
실제로 ‘힙’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서울 성수동에서 지난 10월 이색적인 책 이벤트가 열렸다. 출판사 ‘문학동네’와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가 협업해 ‘더 포에트리하우스(The Poetry House: 시집)’라는 시적인 이름의 공간을 열었다. 창작자들을 위한 문구를 선보이는 포인트오브뷰 한편에 문학동네가 펴낸 시집 ‘문학동네시인선’이 빼곡하게 꽂힌 시인의 서재가 자리했다. 한국 시를 즐기는 기존 문학동네 독자들은 물론, 성수동의 번화한 거리를 거닐다 쇼윈도에 새겨진 다감한 시구에 이끌리듯 들어 온 젊은 방문객들로 행사장은 연일 북적였다.
특히 시인의 방에서 시인과 직접 만나 시집을 추천받고, 별실로 마련된 시인의 집에서 직접 시구를 적어 보고 시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등의 체험형 이벤트가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문학동네 관계자에 따르면 일주일간의 팝업 기간 이곳을 찾은 방문객은 만여 명. 성수동의 다른 팝업과 비교한다면 많은 수치는 아닐지 모르지만, 오로지 시집을 보러 온 인원으로는 절대 적지 않다.
책, 최고의 협업 파트너
젊음과 한층 가까워진 책의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요즘 마케팅 업계에서 책은 최고의 협업 도구로 꼽힌다. 특히 이런 흐름은 시류에 빠른 패션 업계에서 두드러진다. 출판사 민음사는 간판 시리즈인 ‘세계문학전집’을 활용해 패션 브랜드 ‘예일’과 함께 협업 컬렉션을 냈다. 세계문학전집의 책 『위대한 개츠비』미니 북 패키지를 포함한 의류와 책갈피, 엽서 등의 문구를 아우르는 컬렉션이다. 서가에 꽂혀 있을 줄만 알았던 세계문학전집의 재치 넘치는 외도는 지난 2022년에도 이뤄졌다. 당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주제로 온라인 패션 플랫폼 이큐엘(EQL)과 협업한 민음사는 작품에 언급되는 마들렌과 홍차에서 따온 다양한 굿즈(기념 품)를 발매해 호응을 얻었다. 책을 매개로 한 브랜드 행사도 잦다. 지난 6월 미우미우는 서울 성수동에 작은 책 가판대를 열었다. 패션 브랜드의 이벤트이면서도 가방이나 의류가 아니라 책을 전시하고 방문객들에게 선착순으로 책을 나눠 주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됐다. 팝업의 제목도 ‘여름의 책 읽기(Summer Reads).’ 이날 방문객들은 제인 오스틴의 『설득』, 시빌라 알레라모의 『여성』중 한 권의 원서를 아이스크림과 함께 증정받았다. 미우미우는 지난 4월 열린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도 다른 행사가 아닌 문학 살롱(MIU MIU Literary Club)을 열고 줌파 라히리·비올라 디 그라도 같은 작가들을 패널로 초대해 낭독 및 대담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 4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진행된 미우미우의 문학 살롱 © miumiu.com
‘핫플’ 된 도서전
글자 그대로 ‘텍스트가 힙’한 현상은 결정적으로 지난 7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SIBF)’에서 목격됐다. 5일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도서전에 15만 명이 방문하면서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것. 올해로 66회를 맞은 도서전은 본래 출판 업계 관계자들과 일부 책 애호가들을 위한 조용한 행사로 치러지곤 했지만 올해는 달랐다. 입장 대기만 1시간, 수많은 인파가 몰린 도서전은 그야말로 ‘핫 플레이스(hot place·명소)’를 방불케 했다.
이런 흐름은 국내에서만 목격되는 현상은 아니다. 지난 2월 영국 가디언은 ‘Z세대가 책과 도서관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기사로 젊은 세대의 독서 붐을 조명했다. 1997~2012년에 태어난 Z세대들 사이에서 종이책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지난해 영국에서의 책 판매도 역대 최고 수준(6억6900만 권)을 기록했다는 내용이다.
‘독서하는 나’, 콘텐츠가 되다
젊은 세대 사이 독서 붐은 모든 유행이 그랬듯 셀럽(유명인) 그리고 소셜 미디어(SNS)와 함께 자라나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고 외친 모델 카이아 거버는 Z세대에 자리한 독서에 대한 ‘선망성’을 상징한다. 국내서도 걸그룹 르세라핌의 멤버 허윤진의 책 읽기가 소소하게 화제가 됐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틈틈이 책을 읽고 필사를 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고, 출국길 공항에도 책을 들고 나타나 그의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이 주목받았다. 이른바 ‘허윤진 책 리스트’는 Z세대의 독서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독서는 흥행 콘텐츠다. Z세대의 SNS로 통하는 틱톡에서 해시태그(#) ‘북톡(booktok)’을 검색하면 수십만 개의 게시물이 뜬다. 젊은 세대들이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하고 책을 추천하는 콘텐츠를 올리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도 ‘북스타그램’ 해시태그(#)를 달아 자신의 독서 경험을 공유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을 넘어 이를 필사하며 인증샷을 찍어 올리고 있다.
독서가 힙해진 것은 독서 멸종 시대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독서가 일상의 범주에 흔하게 들어와 있다면 독서가 특별해질 수 있을까. 누구나 책을 읽고 소비한다면 책을 읽는 행위가 ‘있어 보일 수’ 있을까.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태어나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와 영상이 익숙한 Z세대 사이에서 독서와 활자가 주목받는 것은 그것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강윤정 문학동네 편집자는 “젊은 독자들은 단순히 책을 읽는다기보다 서점 투어나 독서 모임, 필사 등 책과 관련된 경험에 더 적극적인 경향이 있다”며 “SNS의 영향으로 독서가 고유하고 개인적인 취미에 머무르기보다 음악이나 패션처럼 나를 드러내고 내 취향을 공유하는 하나의 도구가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소연 창비 마케터는 “다독가는 아니더라도 소셜 미디어에 책 사진 하나는 올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다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런 독서 힙 현상을 두고 패션 독서 혹은 과시 독서라는 지적도 나온다. 현실에서 출판계는 불황이고 책 판매량은 떨어지는데, 소셜 미디어 계정에 책 사진이나 독서 모임을 하는 인증 샷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한 독립 서점 주인의 푸념은 이런 과시 독서의 그늘을 보여 준다. 하루 100명이 찾아와도 실제 책을 사는 사람은 몇 되지 않고 전부 사진만 찍고 간다는 얘기다. 실제로 책을 즐기기보다 책을 보는 나, 서점에 가는 나를 증명하고 과시하는 셈이다.
과시라도 좋다, 디지털적 삶 벗어나 즐기는 ‘독파민’
물론 텍스트 힙 트렌드를 단순히 과시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얄팍하다. 책에 대한 관심은 확실히 늘었고, 독서를 향한 호감은 분명히 높아지는 추세다. 특히 태생적으로 독서라는 아날로그적 행위와 멀었던 Z세대에게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들에게 독서는 과시라기보다 디지털적 삶에 대한 반동일 수도 있다.
요즘은 영상도 롱폼보다 숏폼이 대세라고 한다. 긴 영상조차 답답해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 종이책은 가장 반(反)디지털적인 행위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책에 몰입하는 것을 두고 ‘독파민’에 빠졌다는 표현도 나온다. 독파민은 독서와 도파민을 합친 신조어. 길어도 1분이 채 안 되는 숏폼 영상을 끝없이 스크롤하면서 자극을 찾는 도파민 중독자들에게, 저절로 넘어가지도 않고 몰입해야만 읽히는 책은 과부하에 걸린 뇌를 쉬게 하는 훌륭한 도피처다. 최근 조용한 공간에서 홀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북 카페, 위스키 등을 마시며 책에 몰입할 수 있는 책 바(bar)가 하나둘 생기는 것도 같은 이유일 터다.

인증샷 성지로 유명한 스타필드 쇼핑몰의 별마당 도서관 © shutterstock
점점 열기를 더하고 있는 독서 힙 트렌드는 지난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점에 달했다. 수상 발표 다음 날 아침 교보문고의 텅 빈 매대는 텍스트 힙의 어떤 상징처럼도 보였다. 특히 그동안 서점가에서 소외됐던 소설·시·희곡 등 문학 작품의 판매량이 수상자가 발표된 10월 10일부터 일주일간 전년동기 대비 49.3% 늘었다는 뉴스는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글자보다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책보다는 영상을 주로 소비하는 젊은 세대들이 늘면서 얼마 전부터 ‘문해력’이 화두가 되고 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텍스트 힙은 이렇듯 이미지와 영상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Z세대들이 역으로 텍스트 기반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을 멋지고 귀하게 여기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니 과시로서의 독서면 어떻고 보여 주기 위한 책읽기면 어떠한가. 이렇게라도 독서가 힙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텍스트가 주는 기쁨에 빠져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닐까.

인스타그램과 틱톡 등 SNS에서 ‘필사’ ‘booktok’ 등의 독서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면 수많은 콘텐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글 유지연 중앙일보 기자
라이프스타일부와 산업부 유통팀, 생활경제팀 등을 거쳐 현재 이노베이션랩 비크닉팀에서 브랜드와 유통 트렌드,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취재하고 있다.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소비 문화적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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