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클래식]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드뷔시의 ‘달빛'
- artviewzine
- 2024년 3월 11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4월 1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셰이너트 출연 미셸 여,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외 사진제공 워터홀컴퍼니
“큰 꿈을 꾸세요. 그 꿈이 실현된다는 걸 이렇게 보여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성 여러분,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을 결코 믿지 마세요!” 2023년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 말레이시아 배우 미셸 여(楊紫瓊·양자경)가 여우 주연상 트로 피를 거머쥐고서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 배우로는 여우 주연상 첫 수상이었다. 미셸 여의 수상 소감은 전 세계 여성들을 향한 따스한 응원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기발하고 유쾌하게, 경계를 허물다
1980년대 홍콩 영화의 전성기에 미셸 여는 <예스 마담> 시리즈 같은 호쾌한 액션물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장만위(張曼玉)와 왕쭈셴(王祖賢)같은 여배우들이 청순가련형의 이미지로 사랑받았다면, 미셸여는 걸크러시의 원조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침없고 당당한 액션을 선보였다. 장만위와 왕쭈셴에게 ‘여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면, 미셸 여는 언제나 ‘여걸’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 영화인들의 운명도 기로에 섰다.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운명처럼 중국 영화계에 편입되거나, 아니면 할리우드 도전의 기회로 삼거나. 미셸 여는 후자를 택했지만, 할리우드 데뷔작이었던 <007 네버 다이>1997의 본드 걸 역할이 보여 주듯 틀에 박힌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007 네버 다이>와 <와호장룡> 이후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던 미셸 여에게 뒤늦게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겨 준 작품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다. 이 영화에서 미셸 여는 미국으로 이민 온 뒤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계 여주인공 에블린 역을 맡았다. 초반부터 에블린은 국세청의 세무 조사와 남편의 이혼 요구, 대학을 자퇴하고 삐딱하게 구는 딸 때문에 일대 혼란에 빠져 있다. 지금껏 살아왔던 것과는 다른 인생 경로도 과연 가능할까.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 에블린은 우연히 탈출구를 발견하고서 엉겁결에 뛰어든다.
이렇듯 영화는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중 우주(멀티버스)’의 세계관을 평범한 중국계 이민 가정에 적용하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일상과 환상이 마구잡이로 뒤엉키는 초반 설정은 1999년 영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다차원의 세계는 <어벤져스>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닮았다. 배경은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일상적인데 뒤이어 일어나는 상황들은 초현실적이고 우주적이다. 이 기묘한 간극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적 매력이다.
<예스 마담>과 <와호장룡>의 액션 스타 미셸 여가 아니었더라면 자칫 이 영화의 재미는 반감될 뻔했다. ‘에에올’은 삶의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화려한 쿵푸 스타가 됐을 것이라는 자기 언급적 설정을 통해서 배우의 전작들을 패러디한다.
“그 모든 거절과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그것만은 잊으면 안 돼” 같은 대사들도 미셸 여의 실제 삶과 겹치면서 더 큰 공감을 자아낸다.
남루하지만 특별한 그들의 일상
영화에 흐르는 피아노곡이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1862~1918)의 ‘달빛(Clair de lune)’이다. 곡의 제목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의 동명(同名) 시에서 가져왔다. 랑랑이나 조성진 같은 인기 피아니스트들이 앙코르로 즐겨 연주하는 곡으로도 친숙하다. 흡사 ‘달콤한 인상주의’ 같은 독특한 곡의 매력은 오히려 인기 요인이 됐다.
‘에에올’은 다니엘 콴과 다니엘 셰이너트 두 감독이 공동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다니엘 콴은 홍콩계 아버지와 대만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다니엘 셰이너트는 미국 앨라배마 토박이다. 보스턴의 에머슨 칼리지 동창인 이들은 뮤직 비디오를 공동 연출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영화와 드라마로 영역 확장에 나선 이들은 2016년 장편 데뷔작인 <스위스 아미맨>으로 선댄스 영화제 극영화 부문 연출상을 받았다. 이들의 두 번째 공동 연출작이 ‘에에올’이다. 이 영화로 전 세계적으로 1억41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고, 아카데미 7관왕을 비롯해 260여 개의 크고 작은 영화상을 휩쓸었다. 영화 제목처럼 ‘모든 건(everything) 어디서든(everywhere) 한꺼번에(all at once)’ 일어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마블 시리즈의 이색적인 번외편으로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는 딸의 좌충우돌 성장기로도 해석 가능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화려한 액션과 특수 효과, 자유롭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중 우주’의 설정을 빼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시아계 이민자 가정의 남루한 일상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와 가장 닮은 작품은 어쩌면 배우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안겼던 <미나리>일지도 모른다. ‘에에올’의 중국계 이민자 가정이 세탁소를 운영할 때 <미나리>의 한국계 가족은 병아리 감별사로 고단하게 일하는 정도가 차이다. <미나리>의 일상적 주제를 <매트릭스>와 <어벤져스>의 우주적인 방법론으로 다룬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숨은 매력이다.
우리는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고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암암리에 선을 긋는 성향이 있다. 우아한 고급문화와 저속하고 통속적인 대중문화, 주류 지향적인 트렌드와 마니아층에 호소하는 비주류적 감수성 같은 이분법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에에올’은 이런 이분법을 유쾌하게 허무는 성공 사례다. 얼마나 별나고 엉뚱하고 괴상망측하게 묘사하느냐만 차이가 있을 뿐, 주제의 보편성은 여전히 예술의 중요한 화두인 것이다.

드뷔시 피아노 작품집
조성진(피아노), DG, 2017(CD)
왜 독일이나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을까.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파리 유학길에 올랐을 때 문득 들었던 의문이었다. 2018년 드뷔시 서거 100주기를 맞아서 <영상> 1~2집과 <어린이 차지>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등 피아노 독주곡을 녹음한 이 음반은 그 답변과도 같다. 조급한 기색 없는 템포 설정과 영민한 감정 조절, 음색에 대한 탐닉과 점묘법에 가까운 세밀한 묘사까지 조성진의 장기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글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고 『365일 유럽 클래식 기행』『시네마 클래식』 『모차르트』 『씨네 클래식』 등의 저서가 있다. 다양한 강연과 해설 무대는 물론, 유튜브 채널 ‘클래식 톡’을 통해 클래식과 대중의 간극을 줄여 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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