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예술] 경계와 쟁점 다각도로 바라보기, 장애인예술에 관한 이런저런 물음들
- artviewzine
- 2024년 3월 11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4월 1일

장애예술인과 비장애예술인을 평등의 눈으로 완고하게 바라보는 건 비인간적일 수 있으며, 공평의 눈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 shutterstock
사상 유례없는 아트 붐이 펼쳐지고 있다. 미술품의 경매가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아트 페어에서 작품을 구매하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취향 있는 공간을 꾸밀 때 자신만의 아트 컬렉션을 구비하는 게 일종의 상식이 됐다. 이런 아트 대교양의 시대에 새롭게 관심을 끄는 카테고리 중 하나가 장애인예술이다. 우리는 장애인예술에 대해 떠올릴 때 반사적으로 장애인이 창작한 작품을 생각한다. 그런데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장애인예술이 생각만큼 명쾌히 떨어지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게 된다. 장애인예술을 다각도로 바라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장애인예술의 주체
무언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용어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는 일이 급선무다. 그런 면에서 장애인예술은 그 시작부터 난감하다. 국제적으로 장애인예술과 장애예술, 두 용어를 혼용해서 쓰기 때문이다. 일단 한국에서는 장애인예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에 사용하던 장애인문화예술이란 용어가 발전해 장애인예술로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장애인예술 활동 지원이 점차 확대되고 그 공감대 또한 폭이 넓어지면서, 장애인예술에 대한 논의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장애인예술을 단선적으로 바라보기에는 사회적 시선의 해상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모양새다.
개인적으로 ‘장애인예술의 주체는 누구인가?’란 물음을 먼저 던져 본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장애인예술이란 용어가 ‘장애인+예술’인데 당연히 장애가 있는 사람 전부를 포괄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장애인예술은 그 주인공으로 꽤나 명확히 특정 대상을 지칭한다. 바로 장애예술인이다.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을 살피면 장애예술인은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장애인등록증을 발급받았거나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상이등급을 받은 사람으로서 예술 활동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 규정돼 있다. 즉 장애예술인은 법적으로 장애가 있는 직업예술인을 지칭한다.
장애예술의 감동 포인트
장애예술인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대환영이다. 그런데 명심할 점이 있다. 전문 예술인은 주체가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상관없이 그 직접적인 향유자로 보편적인 시민 모두를 포괄한다. 그럴 때에만 전문예술인의 개념이 성립한다. 다소 무례할지도 모르지만, 이번 글의 핵심이므로 용기 내어 질문해 본다. 장애예술인의 작품에서 시민들이 감동하는 포인트는 과연 무엇일까? 장애예술인이 비장애예술인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 성찰, 생각을 전달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신체적·정신적 장애에도 비장애예술인의 작품 못지않은 완성도를 갖기 때문인가. 만일 후자에 따라 장애예술인을 응원하는 거라면 이는 꽤나 큰 문제다. 예술의 매력은 대중이 보지 못하는 것을 제시하고 의문을 던져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성찰에 있지, 전문가적 퀄리티를 구현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갖춘 소수의 장애예술인보다 그렇지 않은 장애예술인이 훨씬 더 많은 게 현실이다(이는 비장애예술인도 마찬가지다). 만일 장애예술가의 자기 서사와 목소리가 아니라 기존 예술 작품에 상당하는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환호한다면, 이는 예술이란 미명 아래 장애인을 소수자로 억압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단적으로, 지적장애인을 모아 피나는 노력 끝에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선율을 선사한 무대에 대해 어떤 사람이 장애인의 내적 성찰과 자의식이 어떻게 구현됐는지 물음을 제기한다고 치자. 이때 ‘힘들게 연습한 친구들에게 왜 이러냐? 정 없게’라는 반응이 나온다면, 장애예술인을 호혜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방증이다. 장애인예술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확고하지 않으면 장애예술인을 돕는 사회적 장치와 노력이 오히려 상황을 호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장애예술인의 경계와 쟁점
앞서 말한 장애예술인의 정의를 다시 가져와 보자. 예술 활동을 직업적으로 영위하지 않는 장애인은 장애예술인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문가에 속하지 않은 시민 예술적 개념의 장애인들은 장애인예술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뜻일까? 장애인예술도 예술이고 장애예술인도 직업적인 예술인이다. 여기에 예술과 예술인을 바라보는 요즘 관점과 반응을 소환해 그대로 대입하면 꽤나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 과연 지금 시대에도 전문 예술인과 시민 예술인을 무 자르듯 경계짓고 있을까? 만약 예술 활동을 하는 비장애인에게 ‘혹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예술활동증명을 완료한 후 예술인패스를 발급받은 예술인이신가요?’라고 물어보면 욕을 무더기로 먹을 것이다. 예술인인지 아닌지 판결하는 기준에 대해 성토하면서 ‘자기표현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 모두가 예술인이지 어디서 옛날 옛적 아카데미즘 얘기를 하냐?’라는 항의를 받을 테다. 그런데 이런 잣대가 장애예술인을 바라볼 때에만 비껴간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예술을 시도하는 장애인 모두가 장애인예술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는 점에서, 작년 12월 29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로 출범한 장애인문화예술과가 장애예술인 지원에만 올인하는 계획이 사뭇 걱정스러운 이유다.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또 다른 쟁점은 장애인에 대한 정의다. 우리나라 법률 중 장애에 대한 기본법 역할을 하는 장애인복지법에서 규정하는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이다. 법적으로 장애인이 되려면 장애인등록증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장애 등급 기준에 부합하는 게 필수다. 만일 신체적, 정신적으로 상당한 제약을 받더라도 등급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장애인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맨눈으로 봐도 아주 명확한 절단 장애일지라도 엄지손가락이 아닌 다른 손가락으로 장애 등급을 받으려면 두 개 이상의 손가락이 각각 두 마디 이상 절단되어야 한다. 운 좋게 한 마디만 절단된 사람은 장애에 대한 트라우마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기타리스트가 사고로 인해 장애 등급에 미치지 못하게 손가락이 잘린 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한다면, 그는 장애예술인인가, 비장애예술인인가?
평등보다 공평의 시선으로
장애인에 대한 정의는 점점 더 포괄적이고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는 신체적·정신적 장애에 사회적 장애까지 포괄한다. UN의 장애인권리협약은 다양한 장벽과의 상호 작용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 동등한 완전하고 효과적인 사회 참여를 저해하는 장기간의 신체적, 정신적, 지적, 또는 감각적인 손상을 가진 사람을 포함한다. 만약 여기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결함 없는 존재가 아니며, 이런 존재론적 장애에 대한 자기 성찰이야말로 예술의 원동력이자 존재 이유’라는 의견까지 넣는다면, 장애인예술을 바라보는 혼돈이 끝나지 않는다.
물론 분명히 말하건대, 존재론적 장애와 법적 장애는 명백히 다르다. 법적 장애는 삶이 끝날 때까지 안고 가야만 하는 가혹한 숙명이다. 장애예술인과 비장애예술인을 평등(equality)의 눈으로 완고하게 바라보는 건 비인간적이며, 공평(equity)의 눈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던진 여러 의문을 곱씹으며 장애인예술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글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그런 단선적인 태도가 장애인, 장애예술인, 장애인예술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과 충돌하고, 깨지고, 재구성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대화의 터전을 마련할 것이므로.
글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을 지냈고 2021년부터 3년간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 공간, 건축, 예술에 대해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문화예술 매거진 <비애티튜드> 편집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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