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디자인] 요리 도구의 역사: 부드러운 음식을 향한 열망
- artviewzine
- 2024년 3월 1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4월 1일

사람과 동물이 먹는 음식의 가장 큰 차이는 가공의 유무에 있다. 동물은 초식이든 육식이든 날것 그대로를 먹는다. 그러니까 동물의 이빨은 날것을 씹고, 사람의 이는 부드럽게 가공된 것을 힘들이지 않고 씹는다. 사람이 음식을 씹는 신체부위를 ‘이빨’이 아닌 ‘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노동의 강도가 좀 더 약하고 우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빨이 아니라 이가 되려면 음식의 원료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되어야 한다. 인류 디자인의 역사는 어쩌면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을 부드러운 문명의 이로 진화시켜 온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익혀 먹기와 인간
현대인은 과일이나 부드러운 야채만 빼고 거의 완벽하게 가공된 음식만 먹기 때문에 과거 인류가 음식을 먹는 데 얼마나 큰 에너지를 쏟았는지 잊은 지 오래다. 인류에게 먹는 일이란 고역이었다. 그들은 사냥 능력이 떨어져 이미 죽어 썩어 가는 동물을 먹는 독수리처럼 시체 사냥꾼에 불과했다. 독수리보다 나을 것도 없었는데, 사체의 단단한 가죽을 찢을 날카로운 발톱도, 강력한 부리나 이빨도 없기 때문이다.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커다란 뇌밖에 없었던 인류는 주위를 둘러보며 날카로운 모서리가 있는 돌을 찾아내서 그 돌로 가죽을 찢었다. 아마도 이런 도구의 발견이 인류의 첫 번째 디자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인류는 돌을 갈아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좀 더 쉽게 사체를 찢었다. 돌칼은 인류가 창조한 최초의 요리 도구인 셈이다. ‘손재주 있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는 도구를 최초로 만든 인류로 추측되고 있다. 그 시기는 대략 290만 년 전쯤이다. 돌도끼와 창 같은 좀 더 진화된 사냥 도구를 만들어 능숙한 사냥꾼이 된 뒤에도 먹는 문제는 여전히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날것을 먹는 일은 이보다는 이빨의 능력을 요구한다. 날고기는 질기고 식물의 뿌리나 줄기, 견과류는 딱딱하다. 오랫동안 씹어야 할 뿐만 아니라 소화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음식을 먹은 뒤 식곤증이 몰려오는 건 피가 위장으로 몰려 뇌가 산소 부족 현상을 겪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는 생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사방이 자연의 위험에 노출된 원시 인류에게 위험하다.
불의 통제와 이용은 인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불은 온기와 밝기를 주고 사나운 맹수로부터 보호처를 마련해 주었다. 불이 인류에게 준 한층 결정적인 변화는 사람의 몸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다. 음식을 익혀 먹음으로써 소화가 더욱 쉬워졌고 더 많은 에너지를 뇌가 가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위는 작아지고 장은 짧아져 다리가 길어지면서 사냥에 유리해졌다. 뇌는 더 커져 인류는 더욱더 정교하게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불을 이용해 날 음식을 어떻게 조리할 것인가를 궁리하면서 음식 도구의 디자인이 다양해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초기에는 돌을 달구어 그 위에서 음식을 익히는 방식을 썼다. 그다음에는 구덩이 화덕을 이용했다. 먼저 땅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그 벽과 바닥을 돌로 메운다. 그 안에 장작이나 땔감을 넣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
불의 열기를 흡수한 돌은 오늘날의 전기 오븐만큼이나 강한 열을 방출한다. 천천히 달궈진 돌은 오랫동안 열을 유지한다. 그 위에 날고기, 또는 나뭇잎으로 감싼 고기나 채소를 올려놓고 천천히 익히는 것이다. 이렇게 천천히 익힌 고기는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맛도 더 좋다. 3만 년 전쯤에 사용된 구덩이 화덕이 중부 유럽에서 발견되었는데, 화덕 근처에서 매머드 뼈가 발견되었다. 거대한 매머드를 사냥한 뒤 고기를 잘라 구덩이 화덕에 넣어 익혀 먹었던 것이다.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집의 중심에는 늘 불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벽난로형의 개방 화덕을 거쳐 19세기 산업 혁명과 함께 석탄을 연료로 하는 무쇠 스토브가 보편화되었다
개방 화덕과 로스팅 잭 그리고 인덕션
인류가 집을 만들면서 구덩이 화덕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원시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집의 중심에는 늘 불이 있었다. 집이란 불을 가두어 이용하는, 속이 비어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은 요리를 하는 데뿐만 아니라 공간을 따뜻하게 하는 데에도 이용해야 하므로 초기 화덕은 개방되어 있었다. 이렇게 벽난로처럼 생긴 개방 화덕이 탄생했다. 근대가 되어 폐쇄된 스토브가 생기기 전까지 유럽의 부엌을 지배했다. 개방된 화덕으로 요리를 하려면 많은 도구가 필요하다. 우선 고기를 직화로 구우려면(roasting) 뜨거운 장작불로부터 약간 떨어져 고기를 허공에 설치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고안된 장치가 로스팅 잭(roasting jack)이다.
로스팅 잭은 쇠로 만든 꼬챙이다. 꼬챙이로 고기를 관통시키고 불 위나 옆에 설치한다. 가만히 두면 한쪽만 타기 때문에 꼬챙이를 지속적으로 돌려줘야 한다. 꼬챙이는 저절로 돌아가지 않으므로 누군가가 쉬지 않고 돌려줘야 한다. 이 고되고 지루한 노동을 턴스핏(turnspit)이라고 한다. 이 일은 기술이 필요 없어서 귀족의 대저택 부엌에서는 대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맡았다. 뜨거운 불 앞에서 꼬챙이를 돌리는 아이들은 얼마나 더웠을까? 이 열악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자 개를 이용하기로 했다. 도르래로 연결된 작은 쳇바퀴 속에 개를 가두고 돌게 한 것이다. 피트니스 클럽에서 자기 의지로 러닝머신 위를 걷는 현대인과 달리 턴스핏 도그(turnspit dog)는 바퀴 속에 갇혀 하릴없이 몇 시간씩 걷도록 강요받았다. 턴스핏 소년과 개를 해방시킨 건 기계화였다. 영국에서는 태엽으로 잭을 돌리는 자동 회전기가 18세기부터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산업 혁명과 근대화는 자동 로스팅 잭조차 과거의 유물로 만들었다. 개방화덕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개방 화덕은 여러 가지로 사람에게 해로운 존재였다. 지나친 열이 요리사를 덥게 한다. 근대 이전에는 많은 요리사들이 옷을 벗고 요리를 했다. 불꽃과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부엌은 건강을 위협한다. 연료 낭비가 심하고 무엇보다도 화재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이를 개선하고자 폐쇄형 화덕이 19세기에 등장했다. 산업 혁명과 함께 석탄을 연료로 하는 무쇠 스토브가 보편화되었다. 커다란 상자 모양의 무쇠 스토브는 서랍처럼 여러 칸이 나뉘어 각각의 공간에서 다른 요리를 할 수 있다. 윗면에는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이거나 냄비나 팬 요리를 할 수 있다. 스토브는 연통을 굴뚝으로 연결해 연기를 빼 낸다. 19세기 스토브는 연기를 어느 정도 제거했지만, 쇠가 지나치게 달궈져 여름에는 부엌이 엄청 더웠다. 20세기에는 가스레인지가 보편화되었다. 가스레인지는 부엌을 연기는 물론 열기로부터도 해방시켜 주었다. 인덕션 스토브는 이제 집 안에서 불꽃조차 제거했다. 불과 100년 전 사람들은 불이 없는 부엌과 집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열망을 바탕으로, 그 과정이 힘들고 위험하며 더럽다는 것을 인식해 회피하려는 욕구가 결합한 결과다.
토기
요리 기술의 진정한 진보는 불로 직접 ‘굽는’ 것이 아니라 물로 간접적으로 ‘삶는’ 것이다. 물을 이용하려면 물을 담는 도구가 필요하다. 토기의 발견이야말로 요리도구 디자인의 진정한 혁신이다. 인류는 대략 1만 년 전부터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토기는 거의 모든 문명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명되었다. 토기가 발명되기 전 원시 인류도 ‘발견된’ 그릇을 이용했다. 원시 인류는 온천수처럼 자연스럽게 달궈진 물에 음식을 익혀 먹으면 부드럽고 맛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아예 의도적으로 물을 뜨겁게 만들어 이용하고자 했다. 이 욕망을 해결하려면 커다란 도약이 필요하다. 바로 용기가 탄생해야 하는 것이다. 용기 역시 처음에는 자연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조개, 전복, 게 같은 갑각류의 껍데기가 ‘발견된’ 용기다. 큰 것으로는 거북이 등껍데기를 이용했다. 부드러워진 음식 덕으로 머리가 좋아진 인류는 머지않아 자연의 용기를 모방한 인공의 용기, 즉 토기를 만들기에 이른다. 용기의 탄생은 도구 디자인의 역사에서 현대인의 어떠한 창의적 인공물과도 견줄 수 없는 커다란 진보와 혁신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토기를 잘 만드는 나라는 번영했다. 고대 그리스는 토기를 주변국에 수출하며 강대국이 되었다. 고대 세계에 고온의 가마에서 빚어내는 토기는 오늘날의 IT 기술에 버금간다. 토기는 또한 예술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은 토기의 표면을 장식했다. 이 장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므로 무용한 예술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스인들이 창조한 회화는 대부분 그들의 주요 수출품인 암포라(amphora) 토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토기는 음식을 단순히 익히는 차원에서 요리하는 차원으로 이동시켰다.
토기가 발명되자 그동안 딱딱해서 먹기 힘들었던 밀, 옥수수, 쌀 같은 곡물을 물에 넣어 끓일 수 있게 되었다. 물에 끓이면 독성이 있는 식물도 먹을 수 있었다. 인류가 곡물을 주식으로 삼게 된 것은 농업 혁명에 앞서 토기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토기는 물이라는 매개물로 음식을 요리하므로 여러 가지 이점이 따른다. 음식이 잘 타지 않는다. 겉과 속이 일정하게 익는다. 힘이 덜 들고 계속 지켜봐야 하는 직화보다 신경이 덜 쓰인다. 무엇보다도 여러 식재료를 혼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리의 혁신이 이루어졌다. 고기와 채소를 물에 같이 넣어 끓이면 더 맛있고 국물도 음식이 된다. 뿐만 아니라 소금, 고추장, 간장, 파, 마늘, 알코올 같은 양념으로 풍미를 더할 수 있다.
(좌) 기원전 500년 전의 그리스 암포라 © shutterstock (우) 빗살무늬토기는 기능과 함께 장식이라는 예술 행위가 더해진 선사시대 인공물이다
팬과 웍과 솥
기술이 발전하며 불에 약한 토기는 불에 강한 금속 용기, 즉 냄비로 발전했다. 금속 냄비는 열을 토기보다 효율적으로 음식 재료로 전달해 빨리 익힐 수 있다. 냄비는 프라이팬으로 그 기능이 분화되었다. 팬을 이용하면서 식재료를 물이 아니라 기름으로 튀기는 요리가 등장했다. 기름을 이용한 음식은 요리의 커다란 진화다. 기름은 물보다 더 빨리 온도가 올라가므로 음식을 빠르게 익힐 뿐만 아니라 식재료의 겉이 구워지면서 바삭바삭한 식감을 준다. 튀김 요리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팬은 열 효율성과 기름진 요리라는 두 가지 장점으로 부엌에서 빠질 수 없는 장비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웍(wok)이라는 그들만의 팬으로 거의 모든 요리를 한다. 웍은 강한 불로 기름을 고온으로 만든 뒤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빠르게 요리를 만든다. 이로써 중국인들은 연료를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중국의 웍에 해당하는 한국의 요리 도구는 솥이다. 우리는 기름에 튀기기보다 삶는 요리가 더 많다. 무쇠로 만든 솥은 열기가 천천히 올라오는 대신 오래감으로써 열 효율성이 뛰어나다. 과거 부엌의 아궁이 위에는 언제나 이 무쇠솥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고대 시대부터 이미 무쇠솥을 만들었지만, 보편화된 것은 조선 시대다. 무쇠 솥은 무거운 뚜껑(무려 솥 전체 무게의 1/3)이 있어서 그 안에 열기를 가둔다. 특히 뜨거운 증기가 솥 안의 식재료를 천천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고르게 삶는다. 한국인은 솥으로 밥과 국 같은 주식은 물론 탕, 수육 등 많은 요리를 했다. 솥에 담아 물과 증기로 천천히 골고루 익히는 우리의 요리 기술은 웍에 넣어 기름으로 빠르게 튀기는 중국 요리와 대비된다.

현대의 압력밥솥은 구리 코일을 솥의 밑면과 옆면에 고르게 분포시켜 쌀에 열을 골 고루 전달하고, 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뚜껑이 강한 압력으로 누른다. 이는 무쇠솥의 원리를 현대의 전기 기술로 재현한 것이다. 아쉽게도 그 맛은 무쇠솥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아궁이를 레인지가 대체하면서 무쇠솥은 일반 가정에서는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불을 멀리하는, 다시 말해 쉽고 안전하고 깨끗한 주방을 향한 진보는 거기에 더 걸맞은 전기밥솥을 수용한 것이다. 가스레인지 또는 인덕션, 전기 오븐과 전기밥솥, 냄비와 팬은 현대의 주방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로 자리 잡았다. 이것들은 과거의 개방 화덕과 아궁이, 토기와 솥이 진화한 것이다. 하지만 요리에 대한 근본적인 취향과 열망은 바뀌지 않았다. 열기를 이용해 더 부드러운 음식을 먹겠다는 그 열망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유지하고, 우리는 더 생산적인 일에 머리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글 김신 디자인 저널리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월간 <미술공예> 기자를 거쳐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2011~13년에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있었다. 2014년부터 칼럼니스트로 독립해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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