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디자인] 러시아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모스크바의 곰과 사회주의 그래픽
- artviewzine
-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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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6월 4일
2014년 러시아 소치(Соч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폐막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러시아 예술가들의 작품이 연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절대주의(suprematism)의 기하학적인 대형 그래픽이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예술 정신을 표현한 그 이미지들이 올림픽에 등장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패럴림픽 포스터에도 말레비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보도 자료에는 “각 포스터의 그림은 평등과 패럴림픽 정신, 인격의 굳건함과 승리의 의지를 상징한다. 이 창의적인 디자인은 러시아의 유명한 예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며 러시아 사람들에게 친숙한 스타일이다”라고 언급되었다.


©shutterstock
미샤와 붉은 별
시간을 거슬러, 198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하계올림픽의 마스코트인 ‘미샤(Misha)’를 떠올리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미샤는 그 이전의 마스코트들과 달리 곰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야말로 수채화 그림과 같았다. 미샤를 디자인한 빅토르 치치코프는 실제로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기하학적인 이미지에만 익숙하던 사람들은 허리춤엔 줄무늬 벨트를 착용하고 미소까지 짓는 미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냉전 시기에 공산 국가에서 열린 올림픽의 마스코트임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첫 사례가 되었다. 행사 당시 미샤가 그려진 머그컵 등 각종 팬시 상품이 서방 세계에서도 불티나게 팔렸고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마스코트로 손꼽힌다.
2014년과 1980년의 두 올림픽이 보여 준 이 같은 상반된 이미지는 러시아의 시각 예술, 특히 그래픽의 두 가지 결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것을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으로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개방 정책 전후의 온도차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사회주의 미학에서 흔히 말하는 리얼리즘은 한동안 추상적인 이미지 자체를 배제하는 명분이 되곤 했다. 하지만 다시 시간을 더 거슬러 가면 미샤보다는 기하학적인 이미지가 러시아의 그래픽 전통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의 또 다른 그래픽이었던, 붉은 별을 담은 엠블럼과 픽토그램만 보더라도 대단히 추상적이다. 소치 올림픽에서 러시아 구축주의(constructivism)와 절대주의를 부각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2014년 소치 동계 패럴림픽 아이스하키와 스키 포스터 / 1980년 모스크바 하계올림픽 마스코트 미샤(디자인: 빅토르 치치코프)

1980년 모스크바 하계올림픽 엠블럼(디자인: 블라디미르 알센비예프)
로드첸코와 평등한 평면
러시아 구축주의와 절대주의는 1920년을 전후로 공존했으나 상대적으로 구축주의가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점을 생각하면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를 빼놓을 수 없다. 알렉산더 로드첸코는 러시아 혁명 이후 등장한 가장 다재다능한 예술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구축주의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2012년에는 러시아 그래픽 디자인 아카데미가 로드첸코 탄생 12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을 만큼 각별한 인물이다. ‘로드첸코 120’이라는 이 프로젝트는 2012년 내내 시카고, 멕시코, 인디애나폴리스, 파리, 푸에블라, 타이베이, 모스크바, 테헤란 등 세계의 주요 도시를 순회했다. 포토몽타주와 사진 작업도 전개했는데 사회 참여적이었으며 형식적으로 혁신적이었고 회화적 미학에 반대했다. 20세기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많은 작품들이 로드첸코의 초기 작업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중에서는 레닌그라드 국영출판사인 렌기즈를 위해 디자인한 <렌기즈: 모든 분야의 지식에 관한 책>이 가장 잘 알려진 포스터일 것이다. 로드첸코가 직접 촬영한 릴리야 브릭의 모습에 글자가 점점 커지는 방식을 활용하여 여성이 책을 사라고 외치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 준다. 이 포스터는 상업적인 디자인이지만 선동선전을 위한 정치적 포스터의 스타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표면’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모더니스트들이 지향한 회화적 추상은 평평한 표면이 특징적으로 드러났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그의 저서 『이미지의 운명』에서 이것이 그래픽 디자인의 표면에서는 ‘평등한 평면’이 되었다고 한다. 미학과 정치가 축약된 형태로서 위계질서 없는 어떤 세계의 모습을 그려 낸 것인데, 여기에 각 기능들이 서로에게로 미끄러져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로드첸코가 항공사 도브롤레트(Dobrolet)를 위해 디자인한 포스터를 그에 딱 맞는 사례로 제시했다. 여기에서는 비행기의 양식화된 형태와 문자가 기하학적 형태로 동질성을 갖는다. 그리고 추상회화와 실용적인 포스터의 동질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신경제 이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실 <도브롤레트> 포스터는 로드첸코가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와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포스터를 본 마야코프스키가 삼류 시인이 쓴 슬로건이라고 비아냥거렸으니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을 텐데 결과적으로는 이 덕분에 둘은 협업을 시작했다. 마야코프스키가 텍스트를 작성하고 로드첸코는 디자인을 맡은 것이다. ‘마야코프스키-로드첸코 광고 건설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붉은 광장의 백화점인 굼ГУМ 등 여러 기업과 기관의 포스터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당시는 소비에트 역사에서 신경제정 책(NEP, 1921~28)으로 알려진 비교적 평화롭고 반자본주의적인 시기였다. 신경제정책이 도입되자 여러 기업과 기관이 경쟁하면서 광고 제작이 활발했다고 한다. 로드첸코를 포함한 구축주의자들은 ‘창작’보다는 ‘건설’이나 ‘구축’이라는 말을 더 좋아했으며 예술의 유일한 적절한 목표가 효율성(utility)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진정한 구축은 실용적인 필요성’이라는 슬로건까지 내세웠으니 상업적 인 그래픽 작업이든, 혁명을 위한 그래픽 작업이든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로 한동안 이처럼 진보적인 생각과 디자인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영미권에 비해 자료가 제대로 공개되거나 연구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대공포의 시대를 포함하여 스탈린이 집권하던 시기는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특히 디자인과 미술, 건축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구축주의와 절대주의의 전통은 더이상 자리 잡기 힘들었다.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에도 계획경제 시스템 아래에서는 그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없었다.
서구에 비해 제품의 수준이나 생산성이 떨어지자 소련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실제로 소련 산업은 노후화되어 있었고, 소련 지도부는 디자인을 국제적 동향에 맞추기 위한 중요한 분야로 주목하게 되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 산업디자인 연구소VNIITE가 1962년에 설립되었다. 이 기관의 러시아어 명칭을 직역하면 ‘전연방 기술 미학 연구소’다. 러시아에서 산업 디자인을 지칭하는 용어는 ‘기술 미학’이기 때문이다. 김종균은 『모던데자인』(이유출판, 2025)에서 “연구소의 디자인은 서방 국가 디자인과는 목적과 방향이 명백히 달랐는데, 디자인을 국민 복지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미국식의 인위적인 진부화와 같은 스타일링 작업은 지양하였다”고 설명한다. 과학 연구 및 혁신을 위한 연구소인 VNIITE는 1960년대 초 다른 많은 신규 연구소와 함께 설립된 싱크탱크think tank로, 소련 산업을 수출에 적합한 품질 기준에 맞추기 위한 임무를 맡았다.

냉전 시대의 문화 교류
아울러 소련은 디자이너들의 국제 조직에 참여하고 싶어 했고, 1965년에 ICSID(국제산업디자 인단체협의회, 현재는 국제디자인기구(WDO)로 명칭을 바꾸었음) 회원국 지위를 얻었다. 10년 뒤에는 마침내 모스크바에서 ICSID 총회까지 열었다.
그해, 1975년의 세계는 무척 복잡한 상황이었다. 우려하던 석유 위기가 현실이 되었고 히피 운동은 평화, 사랑, 이해를 설파했으며, 미국과 소련이 대리전을 벌인 베트남 전쟁은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으로 종결되었다. 또 1975년 7월에는 아폴로 18호와 소유즈 19호가 우주 공간에서 도킹하여 이틀간 실험을 진행했는데 소련과 미국의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악수하는 순간을 전 세계 사람들이 TV를 통해 목격했다.
<ICSID ’75 모스크바 대회>는 소련 입장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30주년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당연히 VNIITE가 주최한 이 행사는 기관의 가치와 역할을 보여 줄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VNIITE는 ‘인간과 인류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Man and Mankind)’이라는 큰 주제로 행사를 기획했다.

ICSID ’75 모스크바 대회 포스터
지금 시각으로 보더라도 ‘디자인을 통한 사회 전체의 인간 복지(Human well-being in society at large; through design)’라는 회의 제목은 대단히 앞선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디자인과 국가 정책’ ‘디자인과 과학’ ’디자인과 노동’ ’디자인과 여가’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 그리고 개발도상국, 재난 구호, 장애인 및 노인을 위한 디자인 등 오늘날의 디자인 연구 주제가 망라되어 있었다. 미국을 제외한 많은 회원국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으나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10월 13일부터 17일까지인 ICDIS 행사 기간이 노벨상 수상자 발표 주간과 맞물렸던 것이다. 이것이 미칠 파장을 예상하지 못한 VNIITE 직원들은 갑자기 격리되어 몇몇 대표자를 제외하고는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또 그 기관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Tekhnicheskaia estetika>의 기자도 이탈리아 디자이너 에토르 소트사스와 인터뷰를 한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에 소련 시민이 해외여행을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세계의 디자인 동료들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가득 찼던 소련의 디자이너들에게는 큰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행사 직전인 1975년 10월 9일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수상자가 바로 소련의 인권 운동가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였던 것이다. 이 소식은 전 세계에 대서특필되었지만 소련만은 예외였다. 가장 강력한 원자폭탄을 개발한 핵물리학자로 이후 평화와 군축을 위해 투쟁한 인물인데, VNIITE 관계자들은 그의 수상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공들여 준비한 행사를 갑자기 국가 보안 기관(KGB)이 간섭하고 감시한 것은 바로 그 소식이 전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과 헌정
그러나 이 사실은 ICSID의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당시 ICSID 행사 중 최대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ICSID/WDO 웹사이트에는 소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ICSID ’75 모스크바 대회 관련 문서는 베를린에서 열린 한 전시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자세한 내용은 당시 대회에 참여한 스웨덴 디자인 전문가들의 기 록과 러시아 내의 기록을 바탕으로 쓴 한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Margareta Tillberg의 <Swedish designers’ Cold War visit to ICSID ’75 Moscow>)
1,500명의 디자인 전문가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인간 존엄성을 위한 디자인과 더 나은 인간 조건을 위한 디자인을 논의했다는 것, 그것도 1975년에 국가 보안 기관의 감시 속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참고한 논문의 말미에는 유리 솔로비예프(Yuri Soloviev)를 비롯하여 엄격한 상황에서도 분투한 VNIITE 직원들에게 글을 헌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디자인 분야에서 러시아만큼 영웅적인 과거를 가진 나라도 별로 없다. 그러나 1920년대 전성기 이후는 어떤가. 1975년의 사건 이래로 VNIITE 관계자들과 마찬가지로, 대공포의 시기를 지나야 했던 로드첸코를 비롯한 당대의 창작자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크고 작은 권력에 의해 절망하고 또 분투했을 것이다. 아마도 2014년 소치 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에서 보여 준 구축주의와 절대주의의 이미지들은 바로 그 예술가와 디자이너, 건축가들에 대한 헌정이 아니었을까.

마야코프스키-로드첸코, <붉은 10월 쿠키> 광고(1923)
글 김상규 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과와 국민대 대학원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퍼시스 가구연구소에서 의자를 디자인했다. 의자를 비롯한 사물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서 큐레이팅과 아카이브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의자의 재발견』 『디자인과 도덕』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의자 디자인으로는 파트라에서 생산 중인 ‘STING’ ‘SKIN’ ‘CITY’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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