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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상의 본질을 알려면 그 대상을 사람들이 어떻게 은유하는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언제나 그림은 그것이 모방하는 실제보다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림은 현실을 이상화하는 경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 은유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 그림의 본질은 대상을 이상화한다는 것이다. 집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은유는 ‘집처럼 편안하다’는 말이다. 손님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이면 집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집처럼 편안하게 계세요”라고. 또 사람은 고향을 그리듯이 집을 떠나면 언제나 집을 그리워한다. 몇 년 동안 집을 떠나 있으면 대개는 향수병에 걸린다. 그토록 기대했던 여행을 가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면 왠지 안도감이 든다. 그 이유는 비록 허름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내가 살았던 집, 살고 있는 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은 어떻게 ‘편안함’이라는 본성을 구축하게 되었을까? 그 과정을 살펴보자.
불을 중심으로 보금자리에 모이다
초기 인류는 한곳에 정착해 살지 않았다. 이동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다. 마치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는 것처럼 인류 역시 잠시 정착한 곳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면 새로운 먹이를 찾아 다시 길을 나섰다. 이동을 하더라도 인류에게는 보금자리가 있었다. 초기 인류의 보금자리는 물리적인 형태의 집은 아니었고, 한 무리가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특정한 장소를 말한다.

영국 밴트리 하우스의 벽난로. 대저택 거실의 중심에는 벽난로가 있다 © Christopher Holt
신경인류학자 존 S. 앨런은 “불은 음식을 나누거나 고기를 먹는 행위처럼 긴밀한 가족 단위로 뭉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며 “집은 150만 년 전 불과 가족의 결합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불은 결국 인류에게 두 가지 정서적 감각에 눈뜨게 했다. 하나는 불을 중심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 가족이라는 따뜻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로부터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고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는 불이 있는 집이다.
다양한 기술적 장치로 불을 대체하다
불은 최근까지 전 세계 모든 집의 중심에 있었다. 저개발 국가에서는 여전히 집 안의 중심에 불이 있다. 하지만 잘사는 나라의 집에서는 이제 더 이상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기 힘들어졌다. 만약 집 안에서 불꽃이 보인다면 그건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고 소화기를 꺼내 당장 진화해야 할 것이다. 수만 년 동안 집의 본질을 구성했던 불은 왜 사라진 걸까? 인류는 기술적 진보의 결과 자연에 개방된 보금자리가 아니라 물리적인 집을 만들었다. 벽과 지붕이라는 경계를 만들어 추위와 더위, 눈과 비, 그리고 독충과 맹수라는 혹독한 자연으로부터 안전한 문명의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공간 안에 불을 피우고 관리했다.
유럽의 경우, 중세까지 궁이나 귀족의 대저택을 뺀 대부분의 집은 여러 공간으로 구획되지 않은 하나의 홀이었다. 그 안에서는 엄마와 아빠, 자식들 그리고 가축이 함께 살았다. 홀의 중심에 화로가 있었다. 화로의 기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요리이고 다른 하나는 난방이다. 따뜻한 건 좋았으나 집 안의 불은 내부 공기를 탁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화재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에 따라 불은 요리용과 난방용으로 분화되었다. 요리를 별도의 공간에서 하고자 부엌이 탄생했다. 거실이자 침실로 사용하는 공간에는 벽난로나 화로를 만들어 불을 난방용으로만 사용했다. 대저택의 부엌은 규모가 크고 그곳에 있던 개방된 화덕 또한 거대해서 화재 위험 또한 상당했다. 이에 따라 부엌을 저택 밖에 만들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와 부엌의 위험하고 뜨거운 개방 화덕은 무쇠 스토브로 대체되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장작이나 석탄으로 태우는 무쇠 스토브는 최종적으로 가스레인지로 대체되었다. 가스레인지는 요리할 때에만 잠시 불꽃을 보일 뿐이었다. 안전하고 깨끗한 것을 극도로 추구하는 현대인은 가스 불조차 위험하다고 여겼는지 전기 인덕션으로 교체함으로써 마지막 불꽃이 사라졌다. 난방 기구는 이미 전통적인 벽난로나 철제 난로에서 불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기 히터, 냉난방 겸용 온풍기 등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런 불꽃 없는 불에 없는 것이 있다. 장작을 태우는 불은 그것을 중심으로 가족을 모이게 함으로써 따뜻함은 물론 강력한 유대감을 안겨 주었다. 현대의 난방 기구는 이 기능이 매우 취약하다.
이 기능을 이어받은 것은 TV다. TV는 불꽃처럼 모니터에서 빛이 나고 스피커로 소리가 나온다. 원시 인류가 모닥불 주위에 모인 것처럼 현대의 가족은 TV 앞에 모여 유대감을 나누었다. 레인지, 인덕션, 전기오븐, 에어프라이어, 히터, 온풍기, 온돌 보일러, TV는 결국 현대인의 불인 셈이다.

한옥의 창호지는 찬바람은 막고 빛은 통과시켜 집 안을 따뜻하고 밝게 만든다 © shutterstock
경계를 만들고 구멍을 뚫다
독일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는 건축의 네 가지 요소로 난로, 지붕, 울타리, 둔덕을 들었다. 건축이란 불을 중심에 두고 바닥, 벽, 지붕으로 경계를 만드는 일이다. 경계는 막혀 있지만 또한 반드시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한다. 그 구멍으로 여러 가지가 드나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드나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문을 만들었다. 집 안을 쾌적하게 하려면 내부의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외부의 맑은 공기가 들어와야 한다. 이를 위해 굴뚝과 창을 만들었다. 창은 바람과 공기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많은 것들이 드나든다. 빛의 유입은 집 안을 밝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난방 장치만큼이나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또한 외부의 소리와 풍경이 들어와야 한다. 외부의 소리는 정보로서 밖의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안전을 보장한다. 풍경은 감상의 대상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
이렇게 채광, 환기, 통풍, 출입의 기능을 하는 개구부(開口部)는 건축 디자인의 핵심이다. 이 기능들이 원활히 제 구실을 하려면 특별한 재료가 개발되어야 한다. 집은 개구부가 막혀 있어야 함과 동시에 뚫려 있어야 하는 모순된 기능을 요구한다. 즉 겨울에는 찬 공기가 들어오지 않도록 개구부를 막아야 하지만 빛과 풍경, 소리는 유입되어야 한다. 과거 서양의 집은 개구부를 열고 닫는 재료로 천이나 나무를 이용했다. 비싼 유리를 감당할 수 없는 대부분의 서민들은 천이나 가죽을 두르고 공기가 차가우면 덧창을 닫았다. 나무 덧창을 닫으면 찬 공기만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풍경마저 차단하니 집 안은 캄캄했다. 이에 반해 한옥의 창호지는 찬 공기를 차단하면서 빛은 유입하므로 방 안이 환하고 따뜻했다. 단점이라면 풍경을 볼 수 없다는 점과 강도가 약하다는 점이다. 유리가 대량 생산된 현대에는 결국 이 재료로 통일되었다. 이처럼 빛과 공기, 소리와 풍경, 사람과 반려동물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집을 느낄 때 사람의 마음은 편안해진다.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빌라 사부아. 현대 건축은 개구부의 크기를 확대하여 빛을 더 많이 들이고 파노라마 풍경을 유입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발전시켰다 © Netphantm
늘어나는 물건을 담다
원시 인류에게는 소유라는 개념이 없었다. 강력한 공동체 정신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관념을 만들었고 소유로 인해 시기와 갈등의 불화가 생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런 이상적인 공동체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후로 집 안에는 물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잉여 자원으로 말미암아 물건만 만들어 내는 전문가 집단이 생겼고, 다양하고 매력적인 물건들이 늘어나자 강렬한 소유 개념이 자리했다. 집은 일종의 커다란 용기容器가 됐다. 그 용기가 담은 것은 사람과 불이었다. 자원이 풍부해지면서 사람과 함께 늘어나는 개인의 소유물도 담았다. 그 소유물은 한 개인의 지위와 정체성을 드러냈다. 가구, 식기, 옷가지, 장신구… 등.
현대에 오면 그 가짓수가 수천, 수만에 이른다. 사람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쌓아 가는 것과 동시에 이런 물건들과도 시간을 쌓아 간다. 집이란 익숙한 사람, 익숙한 사물들의 집합체가 된다. 자신의 소유물이 모두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아닐 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다. 물건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은 각 물건들이 어디에 놓여 있고 언제든지 내가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다는 확신이자 자신감이다. 소유물에 대한 통제력은 가족에 대한 것을 압도한다. 편안함이란 바로 이렇게 익숙한 사람들에 대한 통제력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집, 또는 낯선 공간에 갔을 때를 떠올려 보자. 그 낯선 공간의 물건들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 다시 말해 사용하고자 하면 허락을 받아야 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도 무력함을 느낄 때 우리는 불편해지는 것이다. 낯선 장소에 가면 그 공간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데에만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렇게 에너지를 쓰는 순간 사람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런 에너지를 쓸 필요가 전혀 없는 공간, 그곳이 바로 집이다. 건축·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집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가구와 조명으로 채워져 있어도 그것은 공허할 뿐이다. 그런 공간을 공짜로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내 집이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프랑스의 메종 드 베리. 책꽂이와 책들, 소파와 의자, 테이블 등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익숙한 사물들은 오직 집주인에게만 편안함을 제공한다 ⓒ Christie
세월과 함께 낡아 가고 추억으로 쌓인다
이 세상의 모든 인공적 사물은 낡아 가고 결국 파괴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관리가 되지 않는 빈집은 금방 폐가가 된다. 사람이 사는 집 역시 조금씩 낡아 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세월의 풍화는 집의 지붕과 벽, 바닥에 흠집을 남긴다. 물건 역시 사용감으로 낡아 간다. 풍화, 즉 햇빛, 공기, 수분 그리고 사용에 따라 집과 그 안의 물건들이 상처가 나고 늙어 가는 과정은 필연적이다. 그 풍화의 과정을 온전히 내가 기억할 때 그것은 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된다. 사람은 새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용감이 뚜렷하고 낡은 빈티지에서도 나름대로 멋을 느낀다. 새것이 줄 수 없는 겸손함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낡아 감의 역사를 내가 기억했을 때 그 물건은 더욱 소중해진다. 집안의 모든 물건은 내 기억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오랫동안 쓴 물건이 수명을 다해 폐기할 시간이 오면 큰 상실감을 느끼곤 했다. 20년 가까이 본 TV를 버리게 된 한 부인이 TV를 쓰다듬으면서 그동안 수고 많았다며 떠나보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과 동물, 식물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정이 든다. 뭐든지 오래 함께하면 정이 든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그 물건들은 내 손과 몸이 수없이 매만진 접촉의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이란 터치로부터 쌓인다. 둘째는 그 물건들은 내 취향의 증거다. 셋째는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함으로써 내 기억이 그 물건에 저장되어 있다. 집도 마찬가지다. 집이란 내 손과 몸의 접촉면이고 내 취향의 진열장이며 내 기억의 저장소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없다면 집은 아무리 편리하고 사치스럽고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편안함은 주지 못한다. 편안함을 주지 못하는 집은 내 집이 될 수 없다.
이사를 할 때를 떠올려 보라. 집 안의 물건이 다 빠져나온 그 공간은 물건이 차 있을 때의 공간과 물리적으로는 같지만, 심리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공간인 것이다. 내 물건들이 사라진 순간 편안함도 거품처럼 사라진다. 사람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낡아 가는 집에서 극도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건축가가 세련되고 아름답게 완성한 집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서 진짜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집은 완성되는 법이 없으며 집주인과 함께 늙어 가는데, 그때 비로소 집주인과 가족들에게 아름다움이 아니라 한없는 편안함을 제공한다.

기술의 발전은 집 안에서 불꽃의 존재를 사라지게 해서 안전하고 깨끗하고 세련된 실내를 구현했다. 하지만 기술은 여전히 불의 본질을 버리지 않았다 © Plannerce
글 김신 디자인 저널리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월간 <미술공예> 기자를 거쳐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2011~13년에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있었다. 2014년부터 칼럼니스트로 독립해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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