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 옆 영화관] 영화 <문라이즈 킹덤>: 소년과 소녀의 사랑, 세상의 금기에 도전하다
- artviewzine
-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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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6월 4일
『우연히, 웨스 앤더슨(Accidentally Wes Anderson)』이라는 책이 있다. 사진집이다. 국내에서는 2021년 첫 출간됐고 올해 2권이 나왔다. 꽤 잘 팔리는 책이라는 의미다. 웨스 앤더슨은 미국 영화감독이다. 한국에서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로 유명하다. 국내 극장가에 ‘아트버스터(블록버스터처럼 흥행하는 예술영화)’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영화다.

영화 〈문라이즈 킹덤>
앤더슨 감독 이름이 들어갔으니 그가 찍은 사진들을 모아 놓은 책이라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 그의 영화 속 명장면 모음집도 아니다. 책 제목은 월리 코발, 어맨다 코발 부부가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이름과 동일하다. 팔로어가 191만 명이나 되는 인기 계정이다. 코발 부부는 앤더슨 감독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한 사진들을 계정에 공유하고 있다. 팔로어들이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계정에 ‘우연히’라는 부사가 붙은 이유다. 책은 계정에 올라온 사진들 중 200장을 엄선해 출판했다.
앤더슨 감독이 어떤 이미지들을 스크린에 구현했길래 191만 명이 앤더슨 감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진에 열광하고 이를 즐기는 걸까. <문라이즈 킹덤>(2013)을 보면 궁금증이 해소될 수 있다. 앤더슨 감독의 연출 방식과 개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영화 중 하나이니까.
대칭 구도와 동화로 그려 낸 질풍노도
소년 샘(재러드 길먼)은 카키 스카우트 대원이다. 나이는 12세. 그는 대원 사이에서 문제아로 꼽힌다. 샘은 어느 날 캠프를 탈출한다. 스카우트대에 비상이 걸린다. 샘뿐만 아니다. 캠프가 열린 뉴펜잰스섬에 사는 12세 소녀 수지(카라 헤이워드)도 집을 나간다.
샘과 수지는 공통점을 지녔다. 둘 다 또래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한다. 샘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고, 수지는 엄마 로라(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불륜으로 가족 해체 위기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둘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뜨겁다. 탈출과 가출을 감행한 이유다.
어린 소년 소녀의 단순 일탈 정도가 아니다. 샘과 수지는 성인처럼 사랑한다. 프렌치 키스를 나눌 정도로 농밀한 사이다. 표현 수위가 아슬아슬할 수 있다. 하지만 <문라이즈 킹덤>은 샘과 수지의 불장난 같은 사랑을 소동극으로 그려 낸다. 둘의 사랑이 가끔 애틋하게 보이지 만 관객은 종종 미소를 머금게 된다. 동화 같은 화법 때문이다.
<문라이즈 킹덤>만 동화를 닮은 게 아니다. 앤더슨 감독 영화들은 동화 속 삽화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많다. 그렇다고 가벼운 내용들이 스크린을 채우지는 않는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살인과 킬러라는 심각한 소재로 웃음을 만들어 낸다. <프렌치 디스패치>(2021)는 한 잡지사 기자들의 시련과 분투를 유머로 그려 낸다. 앤더슨 영화 속 심각하거나 진지한 내용은 알록달록한 색감 앞에서 완화된다. 좌우 대칭을 절묘하게 이룬, 지극히 회화적인 화면 구도 역시 동화 같은 이미지를 강화한다. 동화와 대칭 구도는 앤더슨 감독의 인장이다. 『우연히, 웨스 앤더슨』 속 사진들이 품은 감성이기도 하다.


웃음 속에 담긴 변혁기 1960년대의 모습
동화의 화법을 사용한다고 하나 마냥 순진하지는 않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스크린에 스며 있다. <문라이즈 킹덤>은 1960년대 중반 미국을 배경으로 삼는다. 당시 세계는 68혁명으로 대변되던 변혁의 시기였고 미국은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베트남전 참전에 따른 반전 정서, 기존 체제에 대한 반감이 만들어 낸 히피 문화, 대중소비사회 속 시민의 각성 등이 맞물려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이뤘다. 영화는 당시 정서를 샘과 수지의 반항기 담긴 사랑을 통해 전한다. 샘이 캠프를 탈출하고 수지가 샘과 사랑의 도피에 나선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부모 없는 문제아 샘이 아동보호시설에 수용될 위기에 처해서다. 아동보호시설은 아직 남아 있는 기존 체제의 ‘형벌’로 해석할 수 있다.
가족의 해체도 <문라이즈 킹덤>의 주제다. 영화 속 기존 가족은 무너지고 새로운 가족이 재구축된다. 수지 부모의 불화, 로라와 지역 경찰 간부 샤프(브루스 윌리스)의 금지된 사랑, 샘 부모의 죽음은 기존 가족의 붕괴를 상징한다. 샘과 수지가 작은 곶에 자신들만의 안식처(둘은 문라이즈 킹덤, ‘달이 뜨는 왕국’이라고 지칭한다)를 만드는 장면, 샤프가 샘을 입양하는 모습 등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의미한다.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1913~1976)의 어린이 오페라 <노아의 홍수> 공연은 꽤 상징적으로 쓰인다. 샘과 수지는 1년 전 <노아의 홍수> 공연 때 처음 만났고, 이들이 도피 중일 때 섬에 있는 교회에서는 <노아의 홍수>를 공연 중이다. 마침 폭풍우가 몰려와 섬에는 홍수가 난다. 스카우트 기지 텐트가 물에 휩쓸리는 모습은 기존 체제 또는 기성관념이 새로운 물결에 의해 씻겨 나간다는 은유일 수 있다.
부딪치고 싸운다지만 결국 ‘조화’
물론 이 영화의 장면들을 분석하며 굳이 복잡하게 볼 필요는 없다. 10대들의 도피 행각과 어른들의 우스꽝스러운 대응이 빚어내는 웃음과 시각적 재미만으로도 즐겁게 볼 수 있고 음악과 화면의 조화로운 만남만으로도 흥이 나는 영화이기도 하니까. 샘과 수지의 도발적인 행동이 10대 아이를 둔 어른에게는 ‘공포’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말이다.
당시도 지금도 12세 소년, 소녀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렵다. 여전히 유교의 영향을 받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더욱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한창 공부할 나이에’ 같은 지청구나 들을 만한 교제이다.
<문라이즈 킹덤>을 굳이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 사람들의 화합이라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봐도 좋을 듯하다. 영화는 브리튼이 작곡한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으로 시작한다. 목관악기와 금관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각각 개별적으로 연주하다 함께 화음을 맞추게 되는 곡이다. <문라이즈 킹덤> 속 인물들은 각자의 가치 관과 처지에 따라 개별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영화 막바지에 이르면 샘과 수지를 구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 사람은 아무리 부딪치고 싸운다 해도 결국 조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문라이즈 킹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 아닐까.

웨스 앤더슨 감독의 <문라이즈 킹덤>은 7월 16일(수) 성남미디어센터 상영작으로 만날 수 있다.
문의: 성남미디어센터 031-724-8370
글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 전문기자 사진 제공 영화사 진진
1999년 한국일보 입사 후 편집부와 사회부, 국제부 등을 거치며 엔터테인먼트 팀장과 문화부장, 신문에디터로 일했다. 2004년부터 영화를 취재해 왔으며, 영국 서식스대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했다. 저서 『질문하는 영화들』 『말을 거는 영화들』, 역서 『할리우드 전복자들』로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한편, 뉴스레터 ‘영화로운’으로 매주 구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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