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다시보기 2] 성남페스티벌 메인 콘텐츠 <시네 포레스트: 동화>: 숲은 기억한다 – 기술과 예술로 그린 자연의 시학

  • 작성자 사진: artviewzine
    artviewzine
  • 21시간 전
  • 4분 분량

지난 9월 19일, 선선한 가을밤 공기와 함께 가벼운 빗줄기가 내리던 분당 중앙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익숙한 산책로와 나무들의 실루엣은 곧 시작될 70분간의 새로운 풍경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성남문화재단이 주최한 2025 성남페스티벌의 메인 콘텐츠 <시네 포레스트(Cine-Forest): 동화(動花)>는 단순한 야외 공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중심에 자리한 공공의 자연이 기술과 만나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차원의 시적 언어를 획득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 새로운 공연 경험의 장으로, 의미 있는 예술적 시도이자 감각적인 접촉의 순간이었다.

사진 최재우


ree

총감독을 맡은 이진준(카이스트 아트앤테크놀로지 센터장)은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기술과 인간, 자연의 경계를 탐구해 온 예술가이자 학자다. 그의 지휘 아래 펼쳐진 <시네 포레스트: 동화>는 ‘분당 중앙공원’이라는 특정 장소가 품고 있는 역사, 생태,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기억과 깊이 대화하는 예술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는 프로젝션 매핑과 빛을 활용해 도시의 표면을 장식하던 초기 미디어 파사드를 넘어, 예술이 장소와 공동체의 서사를 직조하는 통합적 매체로 진화한 전환점을 보여 준다.

<시네 포레스트: 동화>는 분당 중앙공원을 배경이 아닌, 작품의 핵심적인 주인공으로 제안했다. 분당 중앙공원은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던 숲을 기반으로 한 공원이 아니라 1994년 신도시 개발과 함께 영장산 자락의 지형과 수림을 최대한 보존하며 조성된, 계획된 숲이다. 공원 안에는 성남 곳곳에서 옮겨 온 고인돌 무리와 한산 이 씨 가문의 전통 가옥인 ‘수내동 가옥’이 보존되어 있어 고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 신도시의 시간이 겹친 다층적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와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이진준 감독은 성남의 풍부한 녹지와 첨단 기술 산업이 공존하는 도시 정체성에서 영감을 받아, 숲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연과 기술, 예술을 매개하려는 구상을 구체화했다.


ree

도심 속 숲이 거대한 ‘열린 극장’으로 변한 순간, 분당 중앙공원은 도시와 자연의 경계에서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무대였다


빛과 소리로 그린 확장된 공감의 숲

작품은 이 장소의 ‘진경’을 드러내기 위해 첨 단 기술을 동원한다. 16대의 초고해상도 프로젝터와 레이저는 200m에 달하는 숲의 나무와 나뭇잎, 지형의 불규칙하고 유기적인 표면 그대로를 캔버스로 삼았다. 빛의 입자가 프로젝션 매핑 기법을 통해 나뭇잎 군집에 맺히며 숲은 문자 그대로 ‘움직이는 꽃(動花)’으로 피어났다. 관객은 가상의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 온 실제 나무들이 빛의 옷을 입고 자신의 역사와 생명력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시네 포레스트: 동화>의 경험을 시각적인 인상을 넘어 총체적 감각으로 확장한 또 다른 요소는 ‘미디어 심포니’라 불린 사운드 디자인이다. 시각과 청각, 공간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입체 음향은 이진준 감독이 제시한 ‘증강된 공감(augmented empathy)’을 실현하는 핵심 장치였다. 이 교향곡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소리들을 하나의 시청각적 경험으로 통합하며 관객의 감각을 전방위적으로 열어젖혔다. 공원 전체를 감싸는 3차원적 사운드스케이프 속에서, 관객은 뒤쪽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전면을 울리는 오케스트라, 그리고 1,000명 시민 합창단의 목소리가 뒤섞인 거대한 공명 안에 온전히 잠겼다.

특히 시민 합창단의 존재는 상징적이었다. 이진준 감독은 그간의 작업을 통해 AI 알고리즘이 개인을 ‘취향의 감옥’에 가두고 고립시키는 인식론적 위기를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다. 그러나 공연에 참여한 1,000명의 시민은 수동적 관객이 아닌, 소리 풍경의 공동 창조자로 자리했으며 이는 디지털 고립에 맞서는 아날로그적, 공동체적 저항이다. 가상 플랫폼이 흉내 낼 수 없는 실제 공간의 공명과 호흡은 그 자체로 단절된 개인들을 잇는 치유의 경험으로 작동했다.


경계의 예술, 기억의 체험

이진준 감독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경계 공간(boundary space)’ 혹은 ‘리미노이드 경험(liminoid experience)’이다. 그는 창문, 계단, 무대처럼 이쪽도 저쪽도 아닌, 모호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전환과 초월의 순간에 주목해 왔다. <시네 포레스트: 동화>는 그의 예술적 탐구가 도심 속 숲이라는 거대한 경계 공간에서 펼쳐진 결과물이었다. 분당 중앙공원은 그 자체로 완벽한 경계 공간이다. 계획된 도시와 보존된 자연의 경계, 고대 고인돌과 현대의 아파트가 공존하는 시간의 경계,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실제의 숲과 가상의 빛이 중첩되는 경계에서 관객은 단순한 관람자를 넘어, 온몸으로 이 세계를 느끼는 체험자가 되었다.

이 경험이 남기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육화된 기억’이다. 서늘한 밤공기와 빗줄기의 감촉,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사운드가 몸을 진동시키는 울림, 시야를 덮은 빛의 파노라마, 그리고 1,000명의 목소리가 만들어 낸 공진 - 이 모든 기억은 머리가 아닌 몸에 새겨진다. 이는 감독이 설계한 총체적 경험(total experience)의 구현이며, 2025 성남페스티벌의 주제인 ‘먼저 온 미래’와도 맞닿는다.

<시네 포레스트: 동화>가 펼친 미래는 차가운 기술의 디스토피아도, 공허한 스펙터클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이 인간과 자연, 공동체를 다시 연결하는 미래, 성남문화재단이 지향하는 ‘따뜻한 디지털 문화도시’의 모습이었다.


ree

1,000명의 시민합창단은 관객이자 참여자로 숲의 울림을 목소리로 완성했다


숲을 무대로 한 새로운 시도, 그리고 남은 과제

<시네 포레스트: 동화>처럼 숲을 무대로 삼은 몰입형 미디어 아트는 세계적으로도 확산되는 추세다. 2014년 캐나다 퀘벡에서 진행된 모먼트 팩토리(Moment Factory)의 <포레스타 루미나(Foresta Lumina)>는 숲 자체를 몰입형 전시의 캔버스로 바꾼 선구적 사례다. 관객들은 밤의 숲길을 걸으며 주변 자연에 투영된 빛과 소리, 설화적 이야기가 어우러진 마법 같은 모험을 경험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외 사례가 설치형 전시나 라이트 쇼 형태에 머문 반면, <시네 포레스트: 동화>는 70인조 오케스트라와 1,000명 합창단의 대규모 라이브 음악을 결합하고 수천 명의 관객이 한자리에 모여 동시에 공연을 감상하는 공연형 포맷이라는 점에서 차별점을 갖는다.

가을밤 숲은 그 자체로 거대한 ‘열린 극장’이 되었다. 인공 구조물이 아닌 나무와 나뭇잎은 그대로 무대가 되었고, 나뭇가지마다 투영된 빛은 마치 숲이 숨을 쉬며 꽃을 피우는 듯한 생동감을 자아냈다. 작품의 부제 ‘동화(動花)’는 움직이는 꽃이면서, 동시에 환상의 이야기(fairy tale)를 뜻하는 ‘동화(動花)’와 발음이 같다. 숲에 피어난 빛의 서사를 동화적 정서로 보여 주는 상징적인 제목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대규모 시도가 남긴 과제도 있다. 숲 전체를 무대로 삼는 만큼 빛 공해와 소음이 숲의 본래 주인이었을 조류나 야행성 곤충 등에 미칠 생태적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향후에는 공연 시간과 조도, 레이저 각도 등을 보다 세밀하게 조율해 ‘자연과의 합주’가 환경적 책임감으로 완성도를 더하기를 기대한다. 또한 예술적 측면에서 ‘AI 작곡가’와의 협업 방식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AI가 학습한 데이터나 실제 작곡 과정에서 기여한 역할과 범위가 공개되었다면, 작품이 지닌 ‘기술적 진정성’이 한층 더 깊은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이진준 감독이 “예술의 역할은 자본과 알고리 즘의 거대한 흐름을 잠시 멈추고 환기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시네 포레스트: 동화>는 개인화된 스크린이 강요하는 고립에 대응해 공존과 현존감을 되살리는 문화적 대안의 하나로 자리했다. 70분의 공연은 끝났지만, 그 감각적 잔여물은 관객들의 지각 속에 남아 분당중앙공원을 이전과는 다른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이제 숲은 단순한 나무의 집합이 아니라, 언제든 기억과 마법이 깃들 수 있는 잠재적 캔버스가 되었다. <시네 포레스트: 동화>는 예술이 어떻게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깊이 호흡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시적이고 희망적인 응답이었다.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디렉터

미디어 아트 및 디자인 분야의 연구자, 큐레이터, 교육자로서 국내 미디어 아트 활동의 순환 및 아카이빙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aliceon.co.kr) 편집장(2019), 게임 연구 집단 더플레이 대표, 한국디자인사학회의 학술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태그:

 
 
 

댓글


bottom of page